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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슨른 온라인 온리전 참여작입니다.
*짧기 때문에 단편으로 3편 정도 준비해보았습니다.
*감상 감사합니다.
1. 팀슨 <Happily ever after> 14,059/18,587
"후…."
밀대질을 잠시 멈춘 팀이 제 이마 위로 흐른 땀을 훔쳤다. 언제나 해왔던 일이지만 넓은 수조를 혼자 힘으로 청소하는 것은 예사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 상태라면 저녁 전에 끝낼 수 있을 것이다. 물을 채우는 시간을 생각해도 밤에는 준비 되겠지만 그 애가 지내기 좋은 온도는 아니니 내일 쯤 옮기는 게 좋으려나. 게다가 슬슬 저녁거리도 생각해 두지 않으면-…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잠시 행동을 멈추고 있으면 어디선가 콩콩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 들리는 소린지 고민할 것도 없이 어느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맞은 편에 위치한 커다랗고 투명한 수조 면에 짝 달라붙어 그 투명한 벽을 두드리고 있는 청년이 보였다. 그는 다소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헐벗은 채로 허리아래로는 물고기 꼬리 모양이 자리하고 있었다. 목에서 어깨까지의 선에는 길게 가로로 난 상처가 양쪽으로 자리 하고 있었다. 마치 동화 속에나 언급되는 인어처럼.
"제이슨,"
피로로 흙빛으로 물들었던 팀의 얼굴은 청년을 보자 마자 얼굴에 미소를 띄며 화색을 띄었다. 그리곤 반갑게 그를 부르며 다가섰다는데 밝은 팀의 얼굴과 반대로 어딘가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청년은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더니 이내 입술을 움직여 그에게 자신의 말을 전했다. 뻐끔뻐끔 팀이 쉬이 알아볼 수 있도록 크게 입모양을 만들어 내면 팀이 눈으로 그 말을 읽었다. 그리곤, 다소 맥 없는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조금 힘들지만 괜찮아, 항상하던 일이었잖아.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너야말로 수조가 더러워 졌는데 괜찮아? 물 때가 묻은 곳에 닿는거 싫어하잖아. 힘든 노동을 한 것은 저이면서도 청년을 살피는 모습에 청년이 인상을 찌푸렸다. 일종의 불만 표출이었다. 지금 그게 문제야? 소리를 내지 않았음에도 표정에 그대로 들어나 팀이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정말로 무리하고 있는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마, 알잖아 나 자기 관리 잘하는 거. 마음 같아선 하루만에 해치울 걸 사흘이나 걸려서 하고 있고."
그렇긴 하지만…. 팀의 말은 틀린 것이 없어서, 그의 성격대로라면 하루 날 잡고 끝낼 것들을 3일을 나누어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일을 나누어 한들 넓은 수조를 혼자서 청소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반신이 꼬리인 자신이 도움을 줄 수도 없었고, 또 달리 청소를 할 인부를 구할 수도 없었다. 외부인들에게 청년, 제이슨의 존재는 알려져선 안되기 때문이었다. 지근거리에 인어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어떻게 될지. 어떤 사람은 사람과 닮은 형태에 혐오감을 비칠 수도 있었고, 어떤 사람은 제이슨을 한낮 구경거리고 전락시켜버릴 것이다. 팀이 지켜주려 하겠지만 다수와의 싸움에서 한없이 불리한 입장이었다.
게다가 일상 생활의 거의 모든 것을 팀에게 의존하고 있는 제이슨이 팀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물론 팀이야 제이슨이 무슨 말을 하든 기쁘게 받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제이슨의 기분이 편치 않은 것이다. 그 잘하는 자기 관리. 제이슨만 관련되면 무너지고, 살필 생각조차 하지 않는데. 결국 제이슨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쉬어가며 하라는 말이나, 무리할 때 으름장을 놓는 것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이곳의 모든 관리를 팀이 떠맡았기 때문에 무리하지 않는 게 더 힘든 수준이었다. 궂은 청소가 그나마 준 것이라고는 팀의 몸을 보다 건실하게 만들어주었다는 정도일까.
"마무리가 끝나면 물도 받아둘 테니, 내일 쯤엔 쾌적한 곳으로 옮길 수 있을거야. 그래서 말인데 정말 누울 곳 외엔 필요없어? 아무리 잠깐 지내는 곳이라도 뭔가 더 있는게 좋지 않을까, 거긴 여기보다 커서 꽤 걸릴텐데."
팀이 여태껏 청소한 곳은 간이 수조로, 지금 제이슨이 머무는 수조 청소를 위해 옮겨 두는 곳이었다. 제이슨이 보다 자유롭게 지내기 위해 큰 편이었으나 그래도 원래 머물던 수조보다는 훨씬 작았다. 이 수조도 사흘이 걸렸는데 본 수조는 훨씬더 걸릴 것이 분명했다. 또한 제이슨은 팀처럼 이방 저방을 옮겨 다닐 수도 없어 마음이 쓰여 물어보면 그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반쯤 예상한 대답이라 아쉬움을 숨기고 주억였으나, 제이슨의 대답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콩 가볍게 벽을 퉁기는 소리와 함께 팀을 가리키는 검지손가락. 의아히 제이슨의 얼굴을 살피면 팀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너만 있으면 충분하다. 목소리를 내지 않은 그 대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물론 팀 역시 제이슨만 있다면 다른 건 필요 없었다. 제이슨의 끼니를 챙기지 않아도 된다면 먼저 떠난 연구원과 같은 전철을 밟았을 것이다. …그래 그 연구원, 아마도 팀의 생물학적 아버지일 그는 제이슨을 만든 인물로 인어를 사랑했던 이였다. 마침내 인어를 만들어 낸 그는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자기 최고의 걸작을 보는데 허비했다. 그야말로 식음을 전폐하고서. 그래서 그가 수조 앞에서 잠이 들었을 때 놀랍지 않았다, 아무것도 먹지않고 마시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말이었으니까. 오히려 그런 것치곤 오래 산편이 아닌가.
팀과 연구원은 번듯한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괴짜이나 실력만큼은 알아주어 데려가려는 사람이 줄을 섰을 정도로. 그러나 그는 자신의 어릴 적 소망을 이루기 위해 도시에서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는 인어에 미쳐있었고 '인어'를 직접 보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아틀란티스인이 나타나는 일은 있어도 인어가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 그는 절망에 빠졌었다. 그 모습은 팀도 본 바가 있어서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없다면 제 손으로 만들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모든 것을 뒤로하고 온 것이었다. 달리 의지할 곳이 없는 팀이 그 연구원을 따라 함께 내려왔고, 조수라는 직함을 얻었다.
어디까지나 그 아비에 그 아이인지, 팀 역시 인어에 대한 관심이 막대했다. 그야 기억나는 시절부터 함께 한 것이 인어를 그린 그림이요 논문들이었으니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니 연구원만큼 열성적은 아니어도 연구를 돕고 있었던 것이지만 어느 시점을 기점으로 팀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연구원이 실험을 할 모르모트로서 팀의 또래로 보이는 제이슨을 연구소로 데려온 것이었다. 얼마나 곯았는지 팀보다도 작고 가늘었던 아이는 손에 빵과 먹을 것이 잔뜩 든 봉지를 들고 있었다. 어느 방법으로 그를 데려온 것인지 어렵지 않게 추측 할 수 있었다.
다소 떳떳치 못한 방법으로 데려온 것에 대한 우려는 생각할 틈도 없었다. 팀의 눈동자는 저보다 작고 왜소한 아이를 바라보는 데 바빴으니까. 솔직히 지금에 이르러서도 연구원이 하필 제이슨을 데려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리니 실험 결과가 빠를 것이라 생각했을까? 쉽게 데려올 수 있는 아이가 제이슨 밖에 없어서? 가장 그럼직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제이슨이 인어에 가장 걸맞기 때문이 아닐까. 인어는 아름답다는 것이 통설이고 인어를 그린 수많은 작품이 그러했다. 팀은 처음 보았을 때 넋을 잃고 바라봤을 정도로 제이슨은 인어에 가까우리만치 아름다웠고, 팀은 그 연구원의 아들이었다. 그를 닮아 팀이 인어에 관심이 있듯이 그 역이 있었을지도.
그 때의 제이슨은 지금처럼 제게 살갑지는 않았다. 그동안 지내왔던 삶이 평탄치 않았기 때문인지 손에 먹을 것을 들고 있음에도 살짝 몸을 움츠린채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 연구원이 앞으로 어떤 실험에 참가하게 될 것인지 장황히 설명했으나 그걸 듣는 것 같지는 않았다. 녹음이 섞인 푸른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주변을 살피던 그 애는 제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팀과 눈이 맞았고 두 사람은 한참을 마주보았다. 연구원이 두 사람을 눈치채고 서로 소개시켜 줄때까지.
제이슨은 실험의 하나뿐인 참가자로 비밀 엄수와 실험이 진행됨에 따라 관찰하기 위해 연구소에서 지내게 되었다. 보통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불안해 할텐데 제이슨은 매 끼니가 제대로 나온다는 것과 잠자리가 있음에 매우 만족했다. 자연히 식생활을 책임지고 있는 팀과도 사이가 좋아질 수 밖에 없었다. 연구원은 실험 준비하느라 끼니를 거르는 것이 예삿일이었고, 그의 돈을 사용해 먹을 것을 사고 식사를 준비하는 것도 언제나의 일이었다. 제이슨이 오고 나서는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디저트같은 것들도 몰래 사와 제이슨에게 바쳤다. 또래라는 이유로 옆에서 함께 간식을 나눌 때는 그렇게 행복한 시간이 따로 없었다.
연구원의 설명에 관심없었던 것과는 반대로 제이슨은 제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연구소에 온 이후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것에도 불만을 표하지 않고 신체검사도 심드렁히 받아들였다. 연구원이 주는 주사나 약 역시 거부하지 않았고 그후 도는 약효라던지 변화에 대해서도 세심하게 관찰했다. 팀이 조금 바빠 그를 찾지 않는 날은 그가 찾아와 이후 변동사항이 있는지 없는지도 먼저 이야기해줄 정도로. 다만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지내는 것은 꽤 지루해 보였기에 팀은 제가 가지고 있는 그림책을 몇개 선물해주었다. 오래된 물건이지만 한번 밖에 쓰지 않아 보관상태도 좋았는데, 제이슨은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책이 온통 인어에 관련된 책 뿐이네."
"그 사람은 인어 밖에 관심이 없으니까."
팀의 책을 물려받은 제이슨이 몇가지 책들을 읽더니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었기에 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슨에게 내어준 책 외에도 전부 인어 삽화가 그려져 있는 것들 뿐이었다. 연구원은 꼭 자기 취향의 책들을 골라왔는데 그것을 읽는 것이 팀이어도 그랬다. 사와도 정작 한번도 펼쳐보지 않으면서 인어관련 책은 용케 골라왔다. 인어의 이야기는 전부 이야기가 비슷해서 그런지 흥미롭게 읽던 제이슨의 눈빛이 점점 꺼져가더니 그대로 책을 덮었다. 내용이 다 거기서 거기야. 사람이 생각하는 인어란 대게 그런 느낌인거니까.
"그런데, 여기 나오는 인어는 다 여자 인어던데."
"그렇지? 인어는 아름답다는 이미지가 있으니까."
그치만 난, 남자라고? 내가 아직 너보다 얇고 그렇긴 한데… 그 아저씨 저런 걸 나한테 기대하는 건 아니지? 제이슨이 여성 인어그림이 가리키며 말했다. 아무렴, 그런 엇나간걸 기대하진 않아. 그 사람은 인어에 미친거지 여성 인어에 미친게 아니니까. 그렇담 다행이긴한데-…. 팀의 말에도 조금 불안한 것인지 제이슨은 흘깃흘깃 팀을 살폈다. 왜그래? 팀이 시선을 느끼고 물으면 제이슨이 조금 어물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인어는 아릅답다고 했지?"
"그렇게 알려지긴 했지, 실제로 본 적은 없어서 뭐라고 할 순 없지만."
"그럼 인어가 되면 예뻐지는 걸까? 난 말랐긴 해도 예쁘장한 얼굴은 아니잖아, 예쁘장한건 너지. …내가 인어가 되면 너처럼 되는 걸까?"
"글쎄…, 인어를 만드는 건 우리도 처음이라 얼굴까지 변하는 지는 잘 모르겠어. 사실, 예뻐진다는 것도 잘 이해가 안돼. 이 이상 더 어떻게 아름다워진다는거야?"
"뭐?"
"나는 널 처음 봤을 때, 인어가 사람이 된 줄 알았어. 진짜 인어가 와도 너만큼 아름답진 않을건데… 네가 더 아름다워진다면 난 불안해서 견딜 수 없을거야."
야! 너는 무슨 말을, 그런…! 팀의 말에 제이슨이 드물게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아름답다느니 뭐니… 내가 그런 말을 들어도 말이야. 그렇지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걸. 붉어진 얼굴은 좀 귀엽구나. 어물어물 말하기 시작하는 제이슨을 살피며 팀은 망연히 생각했다. 조금 촉촉하는 눈빛이 이내 매섭게 변하더니, 제이슨이 소리쳤다. 또 안듣고 있지! 몰라, 나 잘거야! 벌떡 일어서 쿵쿵 바닥을 울리며 자리를 떠나는 제이슨을 보며 팀은 문득 생각했다. 정말로 더 예뻐지면 어쩌지.
연구원이 금붕어를 사들고 왔다. 인어라는 표본이 없으므로 인간 실험체 외에 물고기 실험체도 필요했으므로 그것 자체는 놀랍진 않았는데. 그는 아예 키울 생각인지 필요한 물품들을 바리바리 사 와선, 연구소 한켠에 작은 수조를 놓고 녀석들이 지낼 공간을 열심히 꾸몄다. 물을 채운 후 금붕어들을 풀어놓은 연구원은 잔뜩 사온 먹이들을 팀에게 건냈다. 역시나 돌보는 것은 팀의 몫이었다. 제 할일을 그렇게 마친 연구원은 금붕어의 모습을 관찰하기 바빴다. 꼬리 지느러미의 생김새나 헤엄치는 모습 등을 머리에 새기듯 움직임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팀은 그러한 연구원의 행동이 익숙한 지 건네 받은 먹이를 정리하러 움직였다. 결국 팀의 일거리만 늘어난 셈이었다. 연구소 내에서 가장 바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팀의 일이 더 늘어나자 자연히 제이슨과 있을 시간이 줄었다. 팀은 어떻게든 그 시간을 줄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덕분에 중간 중간 팀과 이야기를 섞는 일이 줄어든 제이슨이 불만스러운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주 지극정성이다?"
"실험체를 돌보는 것도 내 역할이니까."
실험을 위한 채혈 시간을 가진 제이슨이 바닥에 드러누우며 말했다. 자주 있지 않은 만큼 한번에 최대한의 양을 가져가기 때문에 약간의 현기증도 있어 그대로 누워 있으면 반전된 시야로 들어오는 팀의 모습에 불퉁한 말이 튀어 나왔다. 제이슨은 제 행동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구태여 말을 고치진 않았다. 팀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정석적인 대답이었으나 제이슨은 그 대답도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야 팀은 연구원의 보조로 연구원이 시킨일을 하는 것은 당연했고 거기에는 물론 저 물고기를 관리하는 일도 있겠지. 하지만 제이슨은 조금 더 다른 대답을 원했다. 왜냐하면 제이슨 역시 같은 실험체였으니까. 팀은 제게 언제나 다디단 핫초코 처럼 굴긴하지만 그건 실험체가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막연한 불안이 있었다. 저 물고기마저 돌봐야하는 실험체이기 때문에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거라면, 자신도 같은 의미가 아닐까. 조금 덜 챙김을 받았더라면 이렇게까지 침울하지 않을텐데. 그러나 팀의 대답은 그 한마디로 끝난 것이 아닌 지, 목소리가 이어졌다.
"거기에 이 녀석들은 널 인어로 만들기 위해, 널 위해 준비된 거니까 조금더 신경쓰게 되네. 너에겐 언제나 최상의 것만 주고 싶으니까,"
그렇게 말하고선 조금 쑥스러운 듯 제 볼을 긁적이는 팀을 보고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팀은 별 생각 없이 넘긴듯 하였으나 제이슨 자신만은 그 아래 자리한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나랑 같은 취급을 하는 것이 싫다는 건, 자신을 특별한 취급을 해주길 바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이슨은, 이제 막 들어온 신입 금붕어들에게 팀의 관심을 나눠갖는 것이 싫었고, 그를 상대로 질투를 한것이다! 아직 제대로 된 실험하나 거치지지 않았으면서 벌써 마음은 인어라도 된듯 물고기와 경쟁하고 있다니 정말로 부끄럽기 그지 없었다. 그나마 위안으로는 팀은 제이슨의 속내까지는 알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많이 힘들어? 오늘이 채혈하는 날이었던가."
"...어, 그래서 꼼짝도 못하겠어."
누워서 시선까지 피하는 제이슨이 걱정된듯 팀이 슨이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 제이슨은 친히 저를 위해 팀이 던져준 그 변명거리를 주워섬겼다. 아주 틀린말도 아닌게 제이슨은 채혈 때문에 어지럼증도 겪고 있어 꼼짝도 못하는 건 맞으니까. 너 주려고 케이크도 사왔는데…먹을 수는 있겠어? 발치에 보이던 하얀 상자는 케이크였던가, 그러고보면 팀은 제이슨이 채혈을 하는 날이면 단 음식들을 가지고 왔었다. 으음, 무리려나. 포크 들 힘도 없어. 그래? 제이슨이 거절하면 팀이 아쉬운 기색을 드러냈다. 잘 볼 수 없는 표정에 제이슨이 말을 덧붙였다. 남겨두면 아깝고 네가 먹으면? 너 주려 산건데 내가 먹을 순 없지. 제이슨의 제안에 팀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일단 자리를 옮기자, 바닥이 차잖아 가뜩이나 몸도 좋지 않은데. 팀이 제이슨을 안아 올리며 말했다. 침대 위로 눕힌 팀이 어깨 위로 까지 이불을 덮어주고는 그 곁에 앉았다. 잠들때까지 있으려는 건가 싶어서 흘깃 살피면 예의 하얀 상자에서 무언가 꺼내고 있었다. 딸기가 얹힌 조각케익은 정말로 제이슨만을 위해 준비한 것인지 동봉된 플라스틱 포크도 하나 뿐이었다.
"자,"
그것으로 무얼 하려나 지켜보았더니 포크로 작게 조각내어 찍고, 그것을 들어 제이슨의 입가로 내밀었다. 생각지도 못한 행동에 눈만 끔벅이고 있으니 팀이 이어 말했다. 드는게 힘든거지 먹는 거 자체가 힘든 건 아니라고 생각해서…혹시 힘들어?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그럼 됐네. 제이슨의 대답에 팀이 다시 한번 포크를 내밀었다. 그 끝을 빤히 보던 제이슨이 받아 먹었고, 빈 포크를 가져간 팀이 다시 케이를 작게 조각내었다. 폭신폭신한 식감에 부드러운 생크림, 그리고 단 맛. 확실히 맛있긴 하지만 마음 한켠으로는 이대로 되나 불안했다.
보통 이렇게까지 해? 제이슨이 보기에 팀의 행동은 매우 과했다. 뭐든 그에게 양보해주고 그를 위해 움직이니 제이슨이 어리광쟁이가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네가 그러니까 내가 금붕어 따위에게 질투를 하는거 잖아. 원래 내것이 아닌 건 욕심내지 않았는데…간이고 쓸개고 내줄 듯 구는 팀 때문에 욕심이 내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래도 좋지 않을까. 제이슨은 실험이 계속 진행되는 동안 여기에 있어야했고 팀은 언제나 자신을 돌봐줄테니까.
금붕어를 실험체로 들이고 수많은 실험 끝에 유의미한 발전 하나를 이뤄냈다. 제이슨의 다리에 비늘이 생긴것이다. 전체를 뒤덮기보다 한두개가 자란 정도로 큰 변화는 아니었지만. 개척지에 이정표가 생긴 것만으로 큰 발전이었다. 제이슨은 제 다리에 난 비늘이 어색한 지 만지작 거렸다. 비늘은 굉장히 연약해서 일정시간동안 물이 닿지 않으면 말라갈라지곤 했다. 제이슨은 어쩔 수 없이 수시로 제 다리에 물을 끼얹어 야 했기에 반바지나, 핫팬츠를 입게 되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물에 담그는 일이지만 몸이 불어 그것조차도 해결방법은 되지 않았다.
제이슨의 변화는 그것 뿐만이 아니었는데, 관찰하기에 그리 드러나는 특징은 아니었다. 팀 역시 식사시간이 된 후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는데 제이슨의 입맛이 변한 것이다. 제이슨은 단 디저트도 좋아하지만 매콤한 류의 것들도 좋아했는데 이번에 준비한 것이 딱 그런 류의 것이었다. 그날도 팀은 제이슨에게 그것을 내밀었고 제이슨은 머뭇거리긴 하나 그것을 받아들였다. 포장을 조심스럽게 벗겨 한입을 먹은 제이슨의 미간이 팍 일그러졌다.
"왜그래? 맛이없어?"
"…아니, 맛이 없지는 않아. 없지는 않은데… 맛있게 느껴지지 않아."
"그 가게 맛이 변한건가?"
"아니, 맛은 그대로인데. 내 입맛이 변한거 같아."
그렇게 말하는 제이슨의 표정이 좋지 않았기에 팀도 섣불리 그를 위로하지 않았다. 경험한 일도 아닐진대 이해하는 척 위로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다만 이곳에 갇혀 살다싶이한 제이슨의 즐거움 중 하나가 사라졌다는 것이 마음에 쓰였다. 그리고 그 원인이 인어실험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겨우 비늘 몇개 돋아난 거 가지고 입맛을 가져가다니. 더군다나 식사시간은 팀이 원없이 제이슨을 바라보아도 문제되지 않은 순간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래도 아직 한가지 음식을 먹어본 것 뿐이니까.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팀은 여러곳에서 음식을 조달해왔으나 어느것도 제이슨의 입에 맞는 것이 없었다.
인어의 입맛으로 바뀌었다고는 하나 그럼 인어의 입맛에 맞는 음식이란 무엇일까. 인어 관련 논문들은 많으나 전부 가설에 지나지 않고 실제 인어를 대상으로 살펴본 일례는 찾아볼 수 도 없었다. 그래서 연구원이 인어를 만들려 했던 것이니 당연한가. 입맞에 맛는 것을 찾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맛봐야겠지만 제이슨에 한해서 한없이 무른 팀은 그에게 억지로 무언가를 먹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역 특징 상 모든 음식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최소한의 횟수로 필수 영양성분을 채워줄수 밖에 없었다.
"팀…."
"응, 괜찮아. 나 여기 있어."
"나, 나…"
"괜찮아, 너는 여전히 아름다워 그건 지금도 앞으로도 마찬가지일거야."
"나, 두고 어디 가면 안돼?"
"내가 어딜가겠어, 네가 여기에 있는데."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변화는 제이슨의 불안을 끌어올렸다. 이미 설명을 들어 알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실제 경험하는 것과는 천지차이다. 본격적으로 인간의 틀에서 벗어나는 게 두렵지 않을 이 없었다. 혹은 자신이 괴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 작은 손으로 팀을 붙들고 있는 그 손을 팀은 조용히 보듬었다. 손의 온기가, 손등으로 느껴지는 촉각이 팀이 여기 있음을 느끼게 할 것이다. 그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제이슨은 천천히 예전 모습을 되찾아갔다.
제이슨의 다리가 전부 비늘에 덮혔다. 땅을 걸었던 두 다리는 하나의 꼬리가 되어 물 속을 헤엄칠 수 있게 되었다. 두 다리가 있었을 때도 헤엄은 칠 수 있었지만 지금만큼 자유롭지는 않을 것이다. 화려한 꼬리 지느러미까지 언뜻 완벽한 인어의 모습일 수도 있으나 제이슨은 아직 수면 아래서 숨을 쉴 수 없었다. 이제 제이슨은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연구소내를 돌아다닐 수 없게 되었고 연구원은 제이슨을 위한 수조를 들였다. 연구소 한쪽을 다 매울 법한 커다란 수조에 물을 가득 담고 제이슨을 이동 시켰다. 수중호흡이 불가능한 제이슨은 이따금 수면 위로 올라와야 했으나 다리가 있음에도 돌아다닐 수 없었던 전보다는 자유로워 보였다.
팀은 이전보다 제이슨과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제이슨이 불안을 내보인 것이 신경쓰였는지 일 하는 시간 외에는 항상 그의 곁을 지켰다. 이따금 태블릿PC를 가져와 바깥의 세상을 보여주곤 했는데 제이슨은 특히 바다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한번도 가지 못한 곳을 향한 동경보다는 '인어'라는 종족에서 오는 회귀반응처럼 느껴졌다. 팀은 기꺼이 제이슨을 위해 바다와 관련된 책을 사왔고, 수면위로 올라와있는 동안은 제이슨의 독서 시간이 되었다. 제이슨이 책을 읽을 동안 팀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 생각에 빠지곤 했다. 깊어지는 생각에 조금 어두운 낯빛을 내면 제이슨이 그의 다리에 손을 올려 바라보곤 했다. 조금 염려스러운 얼굴에 팀이 희미하게 웃었다.
"괜찮아, 제이슨. 나는 어디에도 안가."
있잖아 제이슨, 어디에도 가지 말아줘
팀은 기본적으로 화를 내지 않는 편이었다. 연구원이 그를 조수로 삼아 시시콜콜한 일을 맡길 때에도, 제이슨에 이어 물고기를 돌보는 역할이나 수조를 청소하는 일을 맡겨졌을 때에도 팀은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팀!! 제이슨이 저를 부르는 소리에 급하게 달려갔더니, 목쪽에 피를 흘린채 쓰러져 있는 제이슨과 메스를 든 채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서있는 연구원이 보였다. 손에 든 메스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무엇이 일어났는지는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제이슨…!"
팀은 제이슨에게 먼저 다가갔다. 제 목을 부여잡고 고개를 찬찬히 돌린 그는 팀을 발견하고 설핏 웃어주었다. 팀-. 목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입모양으로 그가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늘,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얼른 처치 하지 않으면…제이슨의 모습 때문에 병원에 데려가는 것은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팀이 처지를 해줄 수 있을 정도로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팀은 곁의 연구원을 노려보았다.
"…당신이 일을 벌였으니, 당신이 처치 정도는 할 수 있을거라 믿어."
분노로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라앉히며 연구원에게 말했다. 곁에서 듣고 있던 제이슨이 팀의 손을 꼭 잡아왔다. 저를 이렇게 만든 사람에게 다시 몸을 맡긴다는게 두렵겠지. 그러나 팀에게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괜찮아, 내가 곁에 있을게, 팀이 제이슨의 손을 살살 쓸며 그를 진정시킨 후에야 치료를 할 수 있었다. 물론 팀도 그 연구원을 신뢰하지 않았기에 그의 움직임을 샅샅이 살폈다. 그의 심중을 살핀 것인지 자기 뜻을 그대로 펼쳤기 때문인지 연구원은 팀이 요청한 대로 처치 후 떨어졌다.
제이슨은 그 이후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것이 두려움 때문인지 목의 손상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쌔액쌔액하는 바람 소리만을 내었다. 돕고 싶은 마음에 의학서적을 뒤졌으나 한계가 있었다. 또한 제이슨은 상처가 다 아물때까지 물 안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물에 들어가더라도 꼬리가 마르지 않도록 반신욕을 하는 정도에 그쳤다. 제이슨의 독서 시간이 좀더 늘었다.
제이슨은 이제 연구원과 독대하지 않았다. 팀이 들어오고서야 비로소 연구원과의 실험을 진행했고 그럴 때마다 팀을 부여잡았다. 팀을 잡은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이 보여 팀의 분노가 솟구쳤다. 이대로 수조 속으로 밀어버릴까. 안그래도 제이슨의 하반신이 꼬리로 변해 이동도 쉽지 않았는데다 인어가 되서인지 물밖에의 힘도 약해지는 편이었다. 그런 아이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다시 속이 끓었다. 제이슨의 앞이라 애써 침착하려 숨을 깊게 내쉬었다. 손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 고개를 돌리면 제이슨이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에 드러났었나, 팀은 제 얼굴을 쓸더니 곧 웃는 얼굴로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이제 괜찮아.
"제이슨,"
"…?"
"바다에 가고 싶어?"
주사를 맞은 후 책상에 엎드러 늘어진 제이슨을 가만히 지켜보던 팀이 말을 걸었다. 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제이슨의 눈에 의문이 깃든다. 왜? 눈짓으로 묻는 제이슨에 팀이 여태 입안에서 맴돌던 질문을 던졌다. 제이슨은 그런 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꼬리를 까딱였다. 제이슨의 일이라면 대게 알 수 있는 팀이었지만 이 대답이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제이슨이 목소리를 잃은 후, 또 유의미한 변화가 생겼다. 목 주위로 없던 흉터가 생긴 것이다. 목으로부터 어깨로 내려가는 길에 한뼘 길이의 베인 상처. 그것도 양 어깨 위로 자리한 그것은 대단히 눈에 띄는 것으로. 그게 생긴 이후 제이슨은 언제든 제가 원하는 만큼 수면 아래에서 지낼 수 있었다. 아가미가 생긴 것이다. 아가미가 생긴 이후 제이슨은 식사 때를 제외하고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게 되었다.
팀의 부름에도 오르지 않게 될 정도이니 인어 실험은 잠정 중단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제이슨의 저항에 연구원도 분노할 법하나, 어엿한 형태를 가진 제이슨은 그로 하여금 완벽한 인어가 탄생했다고 생각하게 끔 만들었다. 아무리 형태가 인어이긴 하나 그 소재가 민물고기인 금붕어로 그 애는 아직 바다에선 살수 없었다. 인어는 민물에서 사는 존재가 아니므로 '인어'라고 할 수 없을 텐데도 연구원은 제이슨의 모습을 감상하기 바빴다.
제이슨을 위한 연구실 한켠을 가득 채운 수조는 투명하여 제이슨이 연구원이 선 방향의 반대편에서 헤엄을 친대도 그의 모습을 살필 수 있었다. 그토록 꿈꾸던 인어가 태어나서인지 연구원은 제이슨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눈에는 기어이 이뤄낸 소망에 대한 희열로 빛내며 유영하는 모습을 살폈다. 수조 안에서 헤엄치는 제이슨의 모습은 작은 어항 속 금붕어와 다를 바 없었다. 아아, 그래서인가. 팀은 연구원이 금붕어를 사들고 오던 연구원의 모습을 떠올리며 비틀어진 웃음소리를 내었다.
처음부터, 처음부터 그는 완벽한 인어를 만들 생각이 없던 것이다. 바다에서 헤엄치는 인어? 그것을 만들면 인어는 제 고향 바다를 향해 떠나고자 할 것이다. 그러니 언제나 언제까지고 지켜보기 위해서는 제가 만든 수조를 벗어나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가 필요했다. 그러니 바다에서 사는 열대어 따위의 바다 물고기를 고르지 않은 것이다. 역겨운 인간, 팀은 자신의 생부일 연구원을 그렇게 판단했다. 연구원이 수조 앞을 떠나지 않고 있을 때 팀은 그의 연구실로 들어가 연구자료를 살폈다. 그가 그렇게 나온다면 자신이 나설 수 밖에. 제이슨은, 제이슨은 아직도 제가 보여주는 바다 영상을 말 없이 지켜보곤 했다. 그리고 팀은 제이슨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이루어주고 싶었다.
[뭘 보고 있는거야?]
"그 사람이 연구하던 자료. 연구가 아직 끝난게 아니니까."
[화내지 않아?]
연구원이 수조에 붙어 있기에 팀은 그를 경계하고자 수조 곁에 머물렀다. 아니, 팀 역시 연구원처럼 제이슨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기에 이곳에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이슨의 소망 또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기에 팀은 그의 곁에서 자료를 읽곤 했다. 그런 팀을 힐끗 쳐다보던 제이슨이, 수면 위로 떠올라와 팀을 툭툭 치며 물었다. 평소에는 그가 말을 걸면 다시 없을 행복한 미소로 제이슨을 바라봐 주었건만 요즘의 팀은 줄곧 저 자료 덩어리만 쳐다보고 있었다. 제이슨이 소리만 낼 수 있었다면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으리라. 샐쭉한 마음에 그 자료에 물이라도 끼얹고 싶었으나 제이슨은 덩치가 자란만큼 커진 도량을 발휘해 충동을 억눌렀다.
그런 대신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인어 연구에 진심이던 그는 아무리 조수인 팀이라도 자료에 손대는 것을 싫어했다. 실험 진행상황을 알기위해 왔던 제이슨이 손을 뻗는 것 또한 쳐냈었고. 그 기억을 떠올려 물으면 팀이 드물게 코웃음을 쳤다. 연구원을 싫어하더라도 저렇게 무시하는 느낌은 받지 않았었는데. 이제 이 자료는 그 사람에게 필요없는 물건인걸, 쓰레기 같은걸 내가 주웠다고 해서 뭐가 문제겠어. 그리고 알면 어떻고, 어차피 곧 죽을건데.
팀은 예의 그 사건 이후 연구원을 끔찍히 싫어했다. 그러나 죽일 것처럼 노려보긴 해도 실제로 행동에 옮기진 않았었는데, 이번의 그는 쉽게 연구원의 죽음을 입에 담았다. 제이슨도 그가 오래 가지 못함은 알고 있었다. 완성된 제이슨을 바라보느라 팀이 가져다주는 식사에 손도 대지 않았으니까. 팀은 그 사실을 눈치채고 곧바로 식사를 치웠다. 그에게는 식사도 물도 건내주지 않았다. 어짜피 먹지 않으면 곧 죽을 인간이었으나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을 내주지 않는다는 것은 팀이 그의 죽음에 일조하는 것과 다름 없었다. 제이슨은 그 사실이 못마땅했으나, 어짜피 주어도 먹지 않을 것 쓰레기를 만드는 것 보다 낫다며 합리화 했다.
[굳이 네가 볼 필요가 있어?]
"바다에 나가야지, 인어는 바다에 사니까. 너도 알고 있잖아 너는 염분이 있는 바다에선 버티지 못해."
그러니까 즉, 팀이 저를 옆에 두고도 본체만체 하는 것은 또 저를 위해서라는 거였다. 팀은 언제나 쓸데없는 것에 힘을 쏟았는데 이번엔 특히나 그랬다. 영라한 편이니 제이슨이 바다를 그리워하는 이유를 모르지 않을텐데도 모르는 척 제이슨이 바다에 살 수 있도록 힘을 쏟는 것이다. 그렇다면? 팀이 부정하지 못하도록 박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럴 필요없어."
"제이슨? 지금 말을 한거야?"
"그럴 필요 없다고."
제이슨이 소리내어 뱉은 말에 팀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직 쌕쌕 공기가 새어나는 소리가 훨씬 많았지만,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팀의 얼굴에 희망이 고였다. 제대로 듣지 못했다고 제게 다가오는 모습에 제이슨은 슬쩍 입꼬리가 올라오려는 것을 억지로 내리 누르며 힘을 실어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자 마자 지척에 이른 팀에게 미소지으며 그의 목을 그러 안았다. 살짝 안은 것이 아닌 끌어당기듯 강한 힘을 주어 목을 안으니 자연스럽데 팀의 몸이 그 아래로 쏠렸다. 이 맹목적인 청년을 어찌할까, 방법은 그가 거절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해결하면 그만이었다.
제이슨이 다시 수면아래로 내려오면 그에게 안겨진 팀 또한 그 아래로 끌려내려졌다. 물 속에서 숨을 쉴 수 있는 제이슨과 달리 숨을 쉴 수 없는데다 급하게 끌려 내려져 무방비한 팀은 금새 호흡곤란을 호소했다. 그런 팀을 사랑스러운듯 응시한 제이슨이 그대로 팀의 입슬에 제 입술을 맞대었고 제 숨을 불어넣었다. 작은 숨이 트이자 다시금 빛을 내는 팀의 얼굴을 살핀 제이슨이 이번엔 숨을 앗아갈듯 굴었다. 다소 거칠고 서툰 솜씨로 키스하는 제이슨에, 팀이 슨이의 뒷목을 그러안고 호응했다. 불면 날아갈 듯 쥐면 꺼질 듯 소중히 했던 이가 스스로 다가온 것이다 팀이 이 유혹을 거절할 수 있을리 없었다, 맞대응하는 팀의 모습이 너무 예상대로라 웃음짓던 제이슨이 저편에서 저를 바라보는 연구원과 눈이 맞았고, 그는 달뜬 기분으로 그에게 손수 가운댓 손가락을 올려주었다. 일그러진 그 얼굴을 팀에게 보여주지 못하는게 아쉽지만, 어차피 팀은 저만 있으면 되니 다시 그가 해주는 키스를 받아들였다.
"제이슨,"
아직 바다에 가고 싶어? 제이슨과 함께 수면 위로 올라온 팀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물었다. 이건 아까하던 행동의 연장선일까. 팀은 바다에 가는 걸 도와주려했다. 하지만 제이슨은 그게 바다에 가는 것이 본 목적이 아니었기에 그걸 막았고 팀도 그걸 이해했을거라 생각하는데-…. 그래서 물어본 것인가. 제이슨이 그저 마음을 고치게 하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니니까, 팀에게 제 마음을 살짝 보여준 지금도 같은 생각인지 묻고 있는 것이다. 제이슨은 그런 팀의 물음에 다시 입을 맞추었다. 그것은 긍정도 아니었지만 결코 부정도 아니었다.
그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연구원은 숨을 거두었다. 물조차 마시지 않은 자의 당연한 최후인지, 제이슨이 보여줬던 충격적인 장면을 본 여파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이슨은 후자였으면 했다. 생각해보니 너무 당하고만 지낸거 같았으므로. 죽은 연구원의 시체는 팀이 내다버렸다. 그의 곁에 이딴 흉측한 것이 있으면 안된다는 이유였다. 연구원과 팀의 사이가 실지로 어떻든 팀은 연구원의 하나뿐인 아들이었으므로 상주가 되었다. 드문불출했던 연구원 탓에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들은 얼마 없었으나 팀은 3일을 꼬박채우고 이후 재산 상속문제로 골머리를 썩혔다. 놈은 죽어서도 팀을 고생시키고 있었다. 다만 다행인것은 제이슨의 설득으로 팀이 연구를 계속하는 것을 포기했다는 것으로 일이 끝나면 팀은 제이슨의 곁으로 돌아왔다. 만족스러운 부분이었다.
시작이 어려웠을까, 제이슨과 팀은 곧 잘 숨을 섞었다. 둘 다 서로가 처음인 탓인지 서툴기 그지 없었으나 어짜피 서로가 하고 싶은 대상은 서로 뿐이었으니까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나 요 며칠 유산정리하랴, 제이슨이 잠깐 지낼 수조를 청소하랴 팀과 맞붙어있는 시간이 줄었다. 압안의 핫초코같이 굴었으면서 어떻게 저를 두고 저렇게 잘 생활할 수 있지? 서운함 감정이 들다가도 팀이 무리하는 모습을 보면 그게 걱정되는 것이다. 뭔가 억울해.
"일이 모두 정리되면 말이야."
"…?"
"일이 모두 끝나면, 바다에 가자."
늘 가고 싶어했잖아. 그전까지는 실험이다 뭐다 가지 못했고, 이제 실험도 더 하지 않으니까. 물론 네가 이동할 수 있게하는건 좀 시간이 걸리겠지만, 기다려줄거지? 어디론가 놀러가자고 하는 사람처럼 가볍게 말하는 팀의 소리에 제이슨이 뻐끔였다. 너는 그래도 괜찮아? 목끝까지 올라온 그 말을, 물을 수 없었다. 바다를 향한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팀의 후속연구를 막았음에도 갈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팀은 죽은 그놈과 같지 않지만 제이슨에게 맹목적인 기질이 있으니까 그곳에 가는 것을 반대할 거라고 생각했기에.
아직 가고 싶냐는 물음에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은, 네가 이곳에 머물기 원한다면 기꺼이 그래줄 의향이 있기 때문이었다. 팀에 대한 감정이 제 소망을 불식시키지는 않았으나 그 소망을 이루는 날을 미룰 수는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소망과 함께 자라난 마음이었으니까. 다만, 네가 양보해준다면 제이슨은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마음과 함께 자라난 소망이니까.
팀은 제 말을 번복하는 일 없이 유산정리를 마치고서도 바빴다. 식사때라든지 잘때는 어김없이 제이슨의 곁에 왔지만 그 외의 시간대에서는 그를 만나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날이 닥쳤다. 팀은 제이슨이 앉을 수 있는 휠체어를 가지고 왔다. 수면 위로 상반신만 들어낸 제이슨을 들어 어렵게 옮기고 그 위로 한껏 물먹은 담요를 덮어주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팀을 보면 팀이 빙글 웃으며 말했다. 가자.
긴 설명은 필요없었다. 팀의 말 한마디에 무슨 일인지 파악한 제이슨이 순순히 팀을 따랐고 방수 코팅뿐만 아니라 조수석 아래 물을 담뿍채운 수조가 놓여있었고 팀은 제이슨을 그 위에 앉혔다. 그의 맨몸이 드러나지 않도록 옷을 걸쳐주고 안전벨트를 채웠다. 뒷좌석 에는 제이슨을 태우고 이동할 휠체어를 싣고 운전석에 앉았다.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ㅡ내 인어님.
팀은 장담한대로 안전하게 그를 바다까지 이끌었다. 차가 갈 수 있는 곳은 차로, 차가 이동할 수 없는 곳은 휠체어로. 사람이 드문 곶에 이르러서야 팀은 제이슨을 안고 바다로 향했다. 바다에 닿는 곳에 이르러 제이슨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면 그가 바다를 만끽하듯 바다아래로 내려갔다 떠올랐다. 이렇게 보니 정말 영락없는 인어였다. 바보같네, 너는 이미 완벽한 인어였는데…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나봐.
"이제 어떻게 하고 싶어? 너를 얽매는 것 아무것도 없으니 마음대로 해도 돼."
해수면의 제이슨과 가까워지기 위해 팀이 그곳에 주저 앉으며 말했다. 인어가 되기 위해 연구소를 찾아왔던 제이슨은, 어쩌면 그곳이 바다라고 착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제이슨은 이미 그 자체로 아름다운 인어였고 굳이 형태에 얽매일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교활하고 역겨운 연구원과 멍청한 팀을 만나 그렇게도 오래 돌아왔던 것이다. 과연 팀이 그런 제이슨은 말릴 권리가 있을까? 팀의 역할은 아마, 이곳에 데려다 준 것으로 역할을 다한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떠나는 모습이라도 지켜보고자 했고.
그 말을 들은 제이슨의 표정이 이상하다. 해괴한 소리를 들은 것 마냥 묘한 표정을 짓던 제이슨이 바다에 가라앉아 있던 손을 들어올려 팀에게 내밀었다. 그 손이 무슨 의민가 싶어 눈을 깜박이다 제이슨을 바라보자 제이슨이 입술을 움직였다. 뭐해, 어서 오지않고. …데려가주는거야? 팀이 조심스레 물으면 제이슨의 표정이 팍 식어선 말했다. 내가 여기있는데, 네가 어딜가려고? 제이슨의 말에 팀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네, 네가 여기있는데 내가 어딜가겠어. 팀이 뻗은 손을 잡자, 제이슨이 그대로 당겼다. 풍덩. 소리가 들린 후 팀이 제이슨의 곁에서 고개를 들어올렸다. 입수 과정에서 소금물이 들어갔는지 연신 기침을 하는 팀의 고개를 돌린 제이슨이 다시금 입을 맞췄다. 바닷물이 섞인 키스는 짠 맛이 느껴졌으나, 제이슨은 조금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식사를 좀 짜게 할걸 그랬나봐."
"…다음에."
다음에 그렇게 해라는 말에 팀이 물었다. 다음에도 곁에 있어주려고? 팀의 말에 제이슨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팀을 가리킨다. 다음엔 내가 찾아오라고? 팀이 뜻을 추측하며 묻자 제이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번엔 네가 나를 찾아온거나 다름 없었으니까. 그래 그럴게, 다음엔 내가 널 찾아갈게. 팀의 말에 만족스러운 듯 웃은 제이슨이 다시금 팀의 목을 끌어안았다. 팀 역시 제이슨의 목을 끌어 안고 입을 맞추었다. 얼마간 이어진 끝에 서로 마주한 둘은 다시 눈을 감았고 제이슨이 팀을 바닷속으로 이끌었다. 아마 팀은 길게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제이슨 역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는 세상에 다시 없을 민물 인어였으므로.
2.뎀슨 <인어 제이슨> 20,829/27,399
어슴푸레한 밤이었다. 구름에 가리워진 달이 제 구실을 못하니 촘촘히 박힌 별들이 제 빛을 냄에도 제 아래의 모든 것을 비추기에는 힘들었다. 준비한 등불은 희미해서 겨우 제 발 앞만을 밝히고 있었다. 무엇을 하기에는 시야가 어두워 불편한 정도지만 갑판에 선 이들에게는 최적의 상황이었다. 뚜벅뚜벅, 배 내부에서 들려오는 걸음 소리에 갑판 위에 선 이들이 모두 긴장했다. 어두운 실내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청년은 큰 키에 단정히 정리된 짧은 검은머리, 그 아래 자리한 녹빛 눈동자는 어둡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금박이 섞인 녹색 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등에 새겨진 문양이 그의 소속을 밝히고 있었다.
"…타켓은? 어찌되었지?"
"이동을 확인했습니다, 곧 이곳에 들어설 것으로 예상됩니다."
사내의 물음에 갑판에 나와있던 사람 중 한명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노리고 있는 대상은 굳이 사내가 나서지 않아도 되는 수준이었다. 남의 바다에 숨어 몰래 무언가를 하고 있는 자가 뭘 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사내가 그들과 동승한 이유는 바다 때문이었다. 타겟이 숨어 일을 꾸미는 바다는 알 굴의 사유로 최근에 그리된 것도 아닌 꽤 오래된 일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무단으로 배를 몰고 있는 것은 알 굴을 무시하는 행위나 다름 없었다. 사막출신이라고 바다에서는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리라 여기는 거겠지. 어리석기 그지 없다. 데미안은, 데미안 알굴은 저를 무시한 어리석은 이들에게 친히 알굴을 알릴 생각이었다. 복종하고 먼저 고개를 숙이는 자에게 자비를, 거역하고 머리를 치켜드는 자에게는 숙청을. 이것이 데미안의 방법이었다.
끼이익, 털이 곤두서게끔 만드는 소리가 나고 마침내 타겟인 배가 모습을 들어냈다. 위장을 할생각인지 낡은 판자들이 덕지덕지 붙어 배를 감싸고 있었는데 그 꼴이 상당히 더러웠다. 바다에서 솟은 돌 기둥을 돈 타켓은 이내 돌섬의 안쪽이자 그림자가 드리워진, 그리고 데미안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제 몸을 숨겼다. 거래시간이 다가올때까지 숨어있으려는 생각이겠지. 이곳에 더한 맹수가 있는줄도 모르고. 목표에 도달한 타겟은 이내 쇠로된 크고 무거운 닻을 내려 정박했고, 데미안의 신호에 따라 무리가 움직였다. 갈고리가 달린 밧줄을 휘둘러 던져 타겟에 걸었고 단단히 걸린 것을 확인한 이들이 밧줄을 이용해 건너갔다. 난관에 선채로 지켜보던 데미안은 모두가 건넌것을 확인하고 타겟으로 넘어왔다. 탁, 가벼운 소리와 함께 나무판자 일부가 가라앉았다. 싼값에 도목이라도 했는지 얼기설기 연결된 틈 사이로 금속 바닥이 보였다. 뭐 이들의 활동시간이 밤이라면 그다지 신경쓰일 정도는 아니긴 했다. 먼저 건너간 무리가 재바르게 갑판의 이들을 포박해 데미안 앞에 내려놓았다. 정신을 잃은 채로 손과 발, 그리고 입까지 틀어막힌 놈들은 깨어나도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어보였다. 어떻게 할까요? 그의 의중을 묻는 소리에 데미안이 답했다. 그냥 둬, 놈들에게 내릴 형은 모두 돌아본 뒤에 내린다. 명을 따릅니다.
내부까지는 신경쓰지 않았는지, 바깥과는 깨끗하고 깔끔한 복도가 데미안들을 밝혔다. 입구를 마주보고 있는 벽에는 선실의 안내도가 걸려있었는데 외부에서 보는 배의 위용에 비해 겨우 2층으로만 이루어진 구조에 데미안이 미간을 좁혔다. 층의 높이가 높다는 가정하에 이러한 구조가 가능할 지도 모르나 데미안이 있는 층도 그리고 그 아래의 있을 층도 크게 차이가 없을 것이다. 즉, 안내된 2개의 층 외에 하나의 층이 더 있을 것이라는 소리였다. 사람의 눈을 피해, 떳떳치 못한 혹은 불법에 속하는 행위와 관련되어 있겠지. 하기사 드러내고 할 짓이었다면 그의 바다에서 이렇게 숨어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대충 훑어 방의 수와 기척을 살핀 데미안이 손가락 몇개를 펼쳐 내보인뒤 계단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지시한 수의 인원을 제외한 이들이 모두 데미안의 뒤를 따랐고 남은 인원은 제 할일을 하기 위해 흩어졌다. 아랫층은 위쪽보다 넓은 공간에 보다 많은 수의 방을 가지고 있었다. 안내판 내용대로라면 이 층에는 사교를 위한 공간도 있겠지. 주변을 가볍게 훑으면 안내판이 설명한대로 마지막 층인 척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없었다. 쿵쿵 가볍게 발을 굴러보면 역시 아래에 빈 공간이 있음을 증명해낸다. 이 곳 어딘가에 아래로 향하는 어떠한 장치가 있을 것이나 이따위 공간에 시간을 할애하기 아까운 데미안은 극약 처방을 쓰기로 했다. 설치해. 적당히 빈 공간을 가리키며 명령하면 이들 중 하나가 나와 작은 폭탄을 꺼내어 설치 후 멀어진다. 콰앙! 큰 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가 자욱해졌다. 이제까지의 은밀한 행동이 허사가 되는 일이었지만 이제와 데미안들의 행적이 들어난다한들 현 상황이 뒤집어질 일은 없었으므로 데미안은 개의치 않았다. 옷을 집어 올려 입과 코를 가리고 제 눈앞을 살펴보면 과연 무리가 들어가고도 충분한 둥근 구멍이 자리해 있었다. 데미안은 저를 따르는 무리가 먼저 가서 살피는 것보다 스스로가 가는 것이 빠르다고 판단해 그곳으로 뛰어내렸다.
탁, 숙련된 암살자는 내려선 소리조차도 달랐는데 제법 높이 차이가 남에도 고양이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듯 유연하고 사뿐히 내려온 데미안은 자욱한 연기 사이로 들어오는 가는 빛을 통해 주변을 살폈다. 내려선 공간은 이제껏 보았던 층들과 달리 하나의 방으로 마치 창고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창고의 한견에는 무언가를 적재하기 위해 놓인 선반들이 빽빽히 자리해있었다. 그리고 그 칸 위로 성인하나가 겨우 들어갈 관들이 각 층마다 들어가 있는데 투명한 관 너머로 한 쌍의 에메랄드들이 빛을 내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사람과 별달리 차이없는 얼굴은 한 이들은 관을 채운 물에 담겨있었는데 조금도 힘들어보이지 않았다. 얼굴 그 너머로 보이는 헐벗은 상반신이며 그 뒤로 보이는 비늘이 덮힌 꼬리-…인어였다. 놈들은 그저 어리석은 것들이 아니었다, 제 목숨이 아까운 줄도 모르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부나방같은 이들이었다. 감히 알굴의 바다에서 알굴의 비호를 받는 종족을 팔 생각을 한다? 우습게 보여도 단단히 우습게 보였군. 놈들에게 호되게 당한 것인지 아니면 폭발과 함께 날아들어온 탓인지 데미안을 보는 인어들의 시선이 아주 따가웠다. 가장 신경쓰이는 것은, 저 멀리 혼자서 커다란 어항에 자리하고 있는 인어의 시선이었다. 데미안을 아주 잡아먹을듯이 노려보고 있는 통에, 시선이 가지 않을래야 안갈 수가 없었다. 그게,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를 좀 더 가까이서 살피기 위해 데미안이 거대 어항을 향해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닫혀진 출입구의 양 문이 열리며 남자 하나가 들어왔다. 자신들이 머무는 선박에서 폭발음이 들렸으니 혹시나 하고 살펴보러 온 것을 테지, 일부러 위장을 해가며 최하단부에 숨겨둔 은밀한 것이 신경쓰일테니까. 자욱한 연기에 잔 기침을 연거푸 하며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마침 걸음 소리에 뒤를 돌아본 데미안과 마주쳤다. 시야에 들어온 녹빛 옷에 남자의 얼굴에 하얗게 질렸다. 아, 알 굴…! 다행히 수납된 인어들과는 달리 데미안을 알아보았는데 그의 위용 때문인지 제 잘못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데미안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음에도 벌벌 떨었다. 데미안을 본 것만으로 이렇게 겁을 내면서, 감히 알굴의 바다에서 천박한 일을 저질렀나? 아니면, 제 아무리 날고 긴다는 알굴도 바다 위에선 어쩔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나? 데미만은 혼잣말 정도로 작게 읊조렸으나 조용한 창고 안에서 더 없이 선명하게 남자의 귀에 닿았고 얼굴을 파랗게 질려가면서도 고개를 회회 저었다.
"아아아아닙니다!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과연? 내 바다에서 인신매매따위를 자행하면서도 업신여기는건 아니다?"
데미안의 물음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니까, 그게-…오해! 오해십니다! 오해라고? 네, 네에! 보십시오 저같은 힘없는 어부가 무슨 능력으로 인어를 사고 팔고 하겠습니까! 그들을 잡으려다 제가 오히려 잡히지나 않으면 다행이죠. 데미안이 제 말을 받아주자 그것이 통하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인어들이 꽤 강한 모양이지?"
"모든 인어들이 그런것은 아닙니다만… 그들은 인어들 중에서도 강한 개체를 골라 전사로 삼습니다."
인어들의 생리에 대해 잘 알고 있군? 예에 뭐어 인어들과 대화할 기회가 있어서 이것저것 물어봤었습니다. 보이는 모습으로는 대화에 응할것 같지 않다만? 대화를 한건 이놈들이 아니고 이전에-…! 그는 설명을 하다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제 실수를 눈치챘는지 눈동자를 굴려 데미안의 얼굴을 확인했으나 도통 변화가 없는 얼굴을 보고 심경을 추측할 수 없었다. 다만 가만히 있는 것으로 추측하건대 그의 실수를 눈치 채지 못한거 같아, 손을 슬며시 내려 놓으며 말을 이었다. 이전에 어린 인어들을 만난 적이 있어서 그때 이야기를 나눴었습니다. 예에, 그렇고 말고요. 덕분에 남들보다 조오금? 더 알고 있을 뿐이지요.
"…그렇다고 하기엔 수갑만 찼을 뿐인데 상당히 얌전하지 않나?"
"아, 그건-…인어라는 게 매우 예민한 족속들이라서 말입니다."
제 몸에 닿는 것에도 아주 예민하게 반응해서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특히 저런 수갑같은 구속구는 더욱 효과가 좋은 편이지요, 그것 외에도 바닷물과 민물의 차이에도 예민해서… 보관하는 쪽에선 퍽 편리한 습성이긴 합니다. 그의 설명에 데미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제딴에는 말에 주의해서 풀어놓는 모양이지만, 아까전의 말 실수도 그렇고 이따금 턱턱 뱉어내는 단어들에서 인어를 경멸하는 태도가 묻어났다. 데미안의 물음에 최대한 답하려하는 것을 보아 어떻게든 알굴의 분노를 피해가려는 모양이지만 안타깝게도. 데미안은 알굴을 상대로 '오해'라는 얼토당토 않는 변명을 하는 저 치를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알굴이 그정도도 알아보지 않고 움직였을거라고 생각하는건지 원.
"그렇군. 그래 우리가 오해 할 수도 있었겠어. 그럼 너는 왜 인어를 이곳에 숨겨둔거지?"
"그게…"
데미안은 이제껏 인어를 환상의 종족이라고만 여겨 따로 알아보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와 인어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었다. 인어가 실재한다고 믿는 것이 더 어리석은 취급을 받겠지만-… 이렇게 인어의 존재가 드러난 이상 누구도 그들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으리라. 그런 점에서 인격체를 장사하는 치라고는 하나 보다 먼저 알고 있던 그가 털어낸 지식은 데미안에게도 썩 유용했고 딱 그만큼 데미안은 자비를 베풀기로 했다. 놈이 대는 핑계를 들어는 주겠다는 것이다. 데미안은 그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은 없으나 혹 모를일이지 핑계가 그럴 듯해 수명이 하루이틀 연장될지도. 그렇게 준 귀한 기회임에도 그는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오해라고 입밖에 내었으나 어떻게 둘러댈지 생각조차 않은 모양이었다.
데미안은 순간적으로 검의 손잡이에 가는 손을 견디느라 애를 먹었다. 성정대로라면 망설였는 시점에서 칼부림이 나야했었으나 데미안은 그의 변명을 들어주겠다고 마음 먹었으므로 이유도 듣지 못하고 벨 수는 없었다. 이런 치에게 이렇게까지 자비를 베푸는 자신의 무름을 탓하면서도 데미안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니까 저는-…알 굴을 기다렸습니다.
"나를?"
"예에, 여기는 알굴의 바다이지 않습니까? 이 바다에서 이런 일이 이루어 지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대신 옮겨주는 척하고 오시길 기다렸던겁니다!"
제 변명이 제법 괜찮다고 여긴건지 끝맺음에는 제법 힘이 실렸다. 무, 물론 제가 아둔해서 오시는 것도 모르고 있긴했습니다만. 그는 이게 데미안을 불러들이기 위한 장치라고 말했다. 이놈들은 일종의 증거자료지요, 아무것도 없이 제보만 하기엔 너무 큰 건이 아닙니까. 감히 알굴의 바다에서 인어를 남획하다니요! 그는 부러 발을 구르며 제 분노를 표했다. 데미안은 그가 스스로 자백까지 하는 꼴에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어떻게 저렇게 멍청한지, 인어가 이곳에서 잡혔다는 사실은 아직 본인들 밖에 몰라 데려온것이라고 하면 충분할 것을. 굳이 여기서 잡혔다는 것을 입에 담음으로 그가 남획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증거라, 확실히 중요하긴 하지. 그렇지만 이렇게 많은 인어들은 필요없어. 한마리만 두고 풀어주는게 좋겠군. 푸, 풀어주다니 인어를요? 그래. 아니, 이게 어떻게 잡은-…아니 어떻게 구한 증거인데 풀어준다니요. 제가 잡은 인어들을 모두 방생시킨다고 하니 제법 아쉬운 모양인지 그가 만류했다. 증거는 한 사람으로 충분해. 어린 인어가 너와 대화했다고하니 그 입으로 상황을 들을 수 있을테니 이렇게 많은 인어를 데리고 있기보다 돌아가게 하는 편이 좋아. 그, 그건-…. 제가 한 말이 있어 차마 뒤집지는 못하고 말을 흐리다 별안간 생각났는지 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여, 여기에 뜻을 같이한 크루들이 있습니다, 미진한 저보다 훨씬 더 힘이 쎈 놈들이니 분명 도움이 될…"
"아참, 그 건에 대해선데."
데미안이 혼자라는 사실에 착안했는지 무리를 부르려는 생각에 데미안이 몰래 실소했다. 인원 수로 밀어붙여서 해결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 어리석음에 기가찼다. 데미안은 보는 앞에서 혀를 차기보다 손을 들어올려 자신의 무리들을 불렀다. 데미안의 신호에 잡아온 선원들을 데미안의 근처에 투두둑 떨어뜨리곤 데미안의 뒤에 서서 부복했다. 아까말한대로 오해가 있어서 말이지, 내 부하들이 전부 제압을 해버렸어. 사실 배 안의 모든 인원들이 덤비더라도 데미안에게 생체기 하나 내지 못하겠지만, 그 사실은 굳이 이야기하지 않기로했다. 제압된 무리만 봐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꼴을 보라지. 결국 제가 덤벼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놈이 망연자실하게 있었고, 데미안은 제 명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친히 명령을 내렸다.
"한 인어만 남겨두고 모두 풀어주도록. 남기는건-… 저녀석으로 하도록하지."
데미안이 거대 어항의 한 인어를 가리키며 말했고 손끝을 쫓아 확인한 무리가 다시 부복하고 창고 구석구석으로 퍼졌다. 데미안은 주저앉은 남자를 지나쳐 어항으로 향했고 말로써 남자를 주저앉힌걸 목도한 인어가 데미안에게 경계를 감추지 않았다. 샤아아! 으르렁거리며 경계하지만 달려들려는 기색은 없었다. 겁을 지레먹고 내는 경계는 아닌것 같고, 덤비려는 것도 아닌 것았다. 재지 않아도 나오는 견적에 덤벼들지 않는게 좋다고 여긴거겠디. 거대 어항 안의 인어는 관안의 인어와 견줄바 없이 미색이었는데 얼굴의 생김새 뿐만 아니라 비늘의 아름다움 또한 결이 달랐다. 또, 다른 것이 하나 있었는데 다른 인어들이 한 수갑이 얇고 가는 것이었다면 그의 양팔을 결박시킨 것이 두껍고 묵직한 느낌의 구속구라는 것이었다.
"이봐. 이 녀석은 왜 저들 것과 다르지?"
앞서 설명한 것이 사실이라면 인어의 외관의 차이 없이 가벼운 수갑이면 끝날 일이었다. 그래서 데미안은 얼이 빠진 남자를 굳이 불렀고 고개를 든 남자가 비척비척 데미안의 곁에 다가가 설명했다. 그놈은-… 다른 놈들과는 달리 흉포한 놈이라 그렇습니다. 수갑이면 끝나는 다른 인어들과는 달리 끝까지 저항하는 바람에 저희 쪽 사람들도 상당히 피해를 입었습니다. 결국 저 무거운 구속구를 단 후에야 겨우 제압이 되었습니다만, 관에 넣으면 또 난동을 부릴 것 같아 커다란 수조에 두었습니다. 일부러 다른 인어들이 잘 보이는 곳에 두면 처지를 꺠닫지 않을까하고…, 충격이 큰 건지, 아니면 빠져나가길 자포자기 한것인지 말을 꾸며낼 것도 없이 솔직히 고하는 남자의 말을 들으며 데미안은 다시 수조의 인어를 보았다.
기를 죽이려 다른 인어들의 꼴을 보였으나 그게 도리어 저항감과 분노만 키운 모양인지 에메랄드빛 눈동자 안에 불씨가 타닥였다. 그래 이정돈 되야 데미안 알 굴의 것이라 할 수 있지. 장차 세상의 지배자가 될 데미안에게는 이 땅도 너무 작았으므로 바닷속 역시 그의 관할이 될것이다 그것을 앞장서 도와줄 바다사람이 필요했고, 데미안은 제 마음에 쏙 든 이 인어가 그것을 이루어주길 바랐다. 수조의 제질을 알아보기위해 가볍게 어항을 두드린 데미안은 손으로 인어가 물러서도록 신호했고 인어는 경계를 풀지 않으면서도 데미안의 지시를 따랐다. 배에 올라 한번도 손대지 않았던 그의 애검에 손을 올린 데미안이 팔을 휘둘러 가볍게 어항을 그었다. 날이 지나간 길로 가는 실선이 생기며 이내 반으로 뚝 나뉘어 쓰러진 어항의 반틈에서 그 관경을 바라보던 인어는, 데미안이 검을 집어넣고 제게 오는 것을 느꼈는지 다시한번 하악질을 했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듯 죽기살기로 물이라도 뿌려볼법한데, 인어는 그저 소리만 낼뿐 데미안을 향해 이를 드러내지 않았다.
"영리하네. 싸우지 않고 상대의 역량을 파악하는 것은 좋은 능력이지."
데미안은 그대로 인어에게 접근해 묶여있는 양팔을 잡아 올렸다. 이때서야 제게 무언가 하는 줄 알고 저항하지만 쉽게 들어올려진 팔은 인어의 뜻대로 쉽게 내려왔다. 자유로워진 양 팔을 연거푸 살피던 인어는 제 앞이 선 데미안을 살폈다. 눈에 띄게 무언가를 하진 않았지만 완전히 경계를 푼 것이 아니었는데, 데미안은 그것 또한 마음에 들었다. 데미안님. 그 사이 명령을 수행한 무리 중 하나가 데미안을 불렀다. 아아, 가지. 데미안은 그래도 걸치고 있던 어두운 빛깔의 녹색가운을 벗어 인어의 꼬리 부분에 감았다. 데미안이 하고 있는 모양을 지켜보던 인어는 이윽고 제가 들어 올려지는 것에 놀란 인어가 마침내 데미안의 어깨를 툭툭쳐서 거부의 의사를 밝혔다.
"너는 나와 갈거다."
그리 강한 힘이 아니었는지 아니면 데미안이 단단한 것인지 데미안은 꿈쩍도 하지 않고 인어를 바라보며 말했다. 말을 알아들은 인어가 데미안을 있는 힘껏 밀어냄으로 거절을 나타내었지만 안긴 상태로 멀어지지도 않았다. 지시한 건 모두 끝냈나? 인어를 안은채로 제 뒤의 인물에게 묻는 목소리는 이제껏 내던 목소리보다 낮고 작았는데, 그것을 용케 들은 인물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아마도 저 뒤의 남자에게는 들리지 않게 하는 말이라 무슨 일인가 싶어, 행동을 멈추고 데미안을 보면. 그 시선을 느낀 데미안이 호기심 어린 인어의 얼굴을 보여 나른하게 웃었다. 곧 알게 될거야.
인어를 안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가는 데미안을 본 남자가 급하게 그를 불러 세웠다. 저, 저기! 마땅히 부를 이름조차 소개받지 않아 어렵사리 말을 걸면 데미안이 걸음을 멈추고 인어에게 눈길을 주면서 말했다. 네가 주는 '선물'은 잘 받았다, 정성을 보아 우리는 너희에게 손대지 않도록 하지. 데미안의 말에 남자의 얼굴이 화색이 들었다, 알굴에게서 생존을 허락받았던게 어지간히도 기뻤던 거겠지. 다만 그 목소리를 들은 것은 남자 뿐만이 아니라, 안겨있던 인어도 마찬가지여서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팔의 구속구가 풀어졌더라도 누군가의 손에 넘어간 것은 마찬가지였고 상대는 인어가 감히 비벼볼 만한 상대가 아니었기에 참는 수 밖에 없었다. 적어도, 적어도 바다가 눈에 보인다면. 저항하기보다 그가 방심한 틈에 도망치는 것이 빠르리라 판단한 인어가 조용히 분을 삭혔다.
남자를 두고 출입구를 향하여 데미안이 발걸음을 옮기면 어느새 온 몸을 검은 천으로 감싼 이들이 줄지어 나타나 데미안을 따랐다. 눈 앞에 보임에도 발소리조차 나지 않음에 인어가 조용히 데미안의 품에 기댔다. 젖은 머리카락이 닿아 데미안의 옷 역시 젖어갔지만 이미 겉옷이든 바지든 다 젖은 마당에 신경쓸것 같지는 않았다. 상대하기 어려운 것은 데미안 뿐만이 아니었다, 그를 따르는 무리 역시 상당한 실력자로 물 속도 아니고 제 무기마저 빼앗긴 상황에 도저히 싸워볼 상대가 아니었다. 저를 안고있는 이에게 청한다면 그 부탁을 들어줄 것이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제 무기를 잃은 인어는 약해진다지만, 아무래도 그에게 부탁하는 것은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싫었다.
조용히 밖으로 나온 인어의 얼굴을 쓰다듬는 바닷바람에 데미안의 가슴에 기대고 있던 고개를 들어 바다로 향했다. 달이 제 아래를 비추고 있어 어두운 가운데도 수면이 출렁이는 것이 눈에 선명히 담겼다. 시야 가득히 담은 바다의 모습에 인어의 마음이 술렁였다. 아아 얼른 가고 싶어, 가까이 가고 싶어. 닿고 싶어 그 속에 빠져버리고 싶어! 장기간 바다와 접하지 못한 반동이었을까 마치 무언가에 홀린듯 바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럼에도 닿지 않음에 이제는 제 몸까지 기울이려 데미안에게서 떨어지려했을 때, 눈 앞이 새까매졌다. 갑자기 어두워진 시야에 술렁임이 뚝 멈추었다, 머릿속일 가득 채운 욕구가 머리를 비우자 바다에의 열망이 식어가기 시작했고 그런 인어의 귓가로 나즈막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바다에 가고 싶은 것이라면 포기하는 게 좋다."
널 거기 가둬둔 놈이 무슨 생각으로 두었는지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좁은 관에 갇혀있던 네 동료들에게는 너도 똑같이 보일터야. 괜히 바다에 들어갔다가 분노에 사로잡힌 동료들에게 당하지 말고. 도망가려한들 풀어줄것도 아니면서. 인어는 눈을 가늘게 떠 데미안의 얼굴이 있는 쪽으로 눈을 흘겼다. 제가 바다에 들어가려 허우적거렸기 때문인지 저를 붙잡는 손이 단단했다. 이거야 있는 힘껏 저항한다고 해도 쉽게 빠지지 않으리라. 하아. 깊게 한숨을 내쉰 인어는 제 팔을 거둬 다시 데미안에게 기댔고 인어가 더이상 저항할 기색을 보이지 않자 손의 힘이 슬쩍 풀렸다.
인어 역시 저를 보는 동료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들도 인어가 그곳에 있는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었으나 장시간 좁은 곳에 갇혀 있다보니 자연히 가까운 위치에 있는 인어를 원망하는 것이리라. 바다에 뛰어들면 공격도 할거고 무기를 잃은 자신이 얼마나 불리할지도 잘 알고 있었지만-…쉽게 당해줄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래서 어쩔거야? 인어는 은원을 잊지않아."
특히 원한은 더더욱. 이제껏 입을 떼도 그 목소리 하나 들려주지 않던 인어가 데미안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단순히 앞의 일을 묻는것에 불과하긴 했으나 제게 조금이라도 마음을 연게 썩 기꺼워 미소를 띈 데미안이 대답했다. 그래, 너도 알 권리가 있으니까. 먹이를 줄 생각이다. 의문을 담아 인어가 데미안을 바라보면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마침 딱 좋은 먹이가 있지않나? 분노한 인어에게 줄 좋은 것이. 어때 감이 잡히나? 데미안의 얼굴을 보던 인어는 이내 선박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답이다. 그렇게 말한 데미안이 훌쩍 뛰어 올라 건너편의 배에 안착했다. 인어를 안고 있었음에도 소리가 가볍기 그지없다. 데미안을 따라 배 위에 올라탄 데미안의 무리가 이내 퍼져 배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어느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데미안이 신호했다. 시작해. 그 말을 시점으로 저 편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연거푸 터져나왔다. 소리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면 데미안이 인어를 향해 말을 걸었다. 너도 보겠나? 그 목소리와 함께 돌아섰던 몸을 돌려 예의 배를 향하게 했다.덕지덕지 붙은 나무판자를 보건대 그것은 인어가 조금전까지만 해도 몸을 맡기고 있었던 인간의 선박이었다. 알 굴의 바다를 더럽힌 놈들이야 우리가 처리하는건 너무 과분한 대접이지. 우리는 우리 손을 더럽히지 않고, 인어는 자신의 손으로 복수를 끝낼 수 있으니 서로에게 이득 아닌가? 아니면, 너도 네 손으로 복수를 하고 싶었나? 가라앉아가는 선박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인어를 보며 묻자 시선을 뗀 인어가 고개를 저었다. 목소리를 다시 내지 않는가 아쉬워지려하면 인어가 질문을 던졌다.
"내가 바다로 가고 싶다고 하면 보내는 주고?"
"아니."
LOA로 복귀하는 동안 인어의 담당이 된 것은 데미안이었는데 그가 데려온 것도 있었고 그 외에 인어의 성질머리를 감당할 사람이 없었던 것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인어가 다른 사람의 손을 타는 것을 보기 싫었던 것이 가장 컸다. 데미안이 어떠한 핑계를 댈 것도 없이 데미안이 돌보겠다고 하니 물러간 무리는 정말 그 이후로 인어에게 신경쓰지 않았다. 말 한마디로 무리를 이끄는 데미안이 인어는 조금 불편했다. 차라리 무리라면 조금이라도 기회가 있는데, 이 인간남자는 너무 틈이 없어 기회를 노리기도 힘들었다. 인어를 위해 욕조에 항상 물을 받고 또 어떨때는 신선도를 위해 가려주기도 했다. 방안에 있기 지겹다고 말하면 안고 갚판 위로 나오기도 했다. 오랜 시간을 그러고 있어도 팔이 아프지도 않은지 자세하나 바뀌지 않는 통에 인어의 비늘이 먼저 말라 돌아가야했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데미안의 머무는 곳으로 함께 가야만했다.
"곧 있으면 내가 머물고 있는 거점에 도착할 거야."
인어의 불안을 알아채기라도 한듯 데미안이 말을 건냈고, 인어는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이런, 아직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지? 데미안은 인어가 도망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을 알고 있던 모양인지 의도적으로 무시하려는 인어의 모습에 툭하니 한마디를 건내니 인어가 매섭게 노려본다. 늘 노려보기만 하지 공격하진 않지만. 왜 그렇게도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인지, 데미안은 바다에 있을 때부터 더 챙겨줄 수 있는 자신이 있었다. 혹, 그날 보았던 그 모습과 연관된 것이 아닐까. 데미안은 바다에 홀린듯 굴던 인어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나 무언가 추측하기에는 정보가 적었다. 적어도 데미안이 함께 갑판 위로 나왔을 땐 더이상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그런 것보다도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는게 먼저다, 인어에겐 아쉬운 일이겠으나 이미 지척까지 온 마당에 인어가 데미안의 손을 벗어날 가능성은 없었다. 설령 진짜 놓친다고 하더라도 데미안이 손에 넣고자 하는 것은 전부 데미안의 손에 들어오게 되있었다.
"데미안 알 굴이다."
정확히는 더 긴이름이지만 이것만 기억해도 충분해. 데미안의 뜬금없는 말에 인어가 그를 바라보면 말을 이었다. 거점에는 이 배와는 달리 수많은 사람들이 있을 거다 거기서 나를 콕집어 부를 수 없을테니 이름을 알아두는 편이 좋울거다. 데미안의 말에 인어가 들었던 이름을 입안에서 굴리다 뱉어냈다. 데미안? …그래. 그러고보면 데미안을 따르던 무리들이 '데미안님'이라고 부르긴 했었지. 자신도 그렇게 부르는게 종을까 생각하다 접었다. 그래선 마치 인간 남자를 따르는 듯한 모습이 되고, 이름을 불러도 별말하지 않으니 이대로도 좋을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인어가 부르는 방식은, 곧 전 세계를 휘하에 둘 그에겐 썩 어울리지 않았다. 이름에 원을 담는다는 동양의 작명방식을 따르듯 데미안을 따르는 이들은 언젠가 그가 세상을 제 발 앞에 두기를 바라며 '데미안님'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난 인어가 데미안을 그저 '데미안'이라고 부르는 것은 반감을 을 일으키리라. 또 어떠한 멍청이들은 데미안을 우습게 여길수도 있겠지. 허나 이 모든 것은 데미안에게는 사소한 일이었다. 내가 인어의 호칭을 묵인하는데 그 누가 인어에게 뭐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다만, 거점에는 감히 데미안에게 말을 얹을 수 있는 상대가 몇몇 있었다.
"……."
"용건을 말씀하시죠, 어머니."
미뤄두었던 일을 하기 위해 집무실에 있는 데미안을 불쑥 찾아온 그의 모친, 탈리아가 그 중의 하나였는데 그는 제 아들이 자기에게 내려준 차를 가만히 마시기만 했다. 결국 데미안이 먼저 말을 꺼내야 했는데, 살갑지 않은 데미안의 물음에 탈리아가 잔을 내려놓았다. 탁, 그리 크지 않은 소리였으나 우아한 그는 원래 소리내지 않고 내려놓는 것이 보통이라는 점을 헤아린다면, 그는 불쾌감을 표하고 있다는 것이 되었다. 역시 인어 때문인가.
"…성가신 걸 주웠다고 들었다."
데미안의 재촉에 탈리가가 에두르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어머니께도 이야기가 들어갔습니까? 이곳의 이야기는 전부 내게 들어오지, 너도 이미 알고있지 않니? 그럼에도 먼저 찾아오지 않아서 조금 섭섭했단다. 일이 정리되면 찾아갈 생각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자리를 비운 사이 쌓여있던 것들이 많다보니. 데미안의 대답에 탈리아가 가만히 그를 들여다보았다. 그 이야길 왠만한 일들보다 뒤로 했다는 것은 지금의 소란이 제가 잡고 있는 업무보다 중요치 않다는 의미겠지. 그의 뜻을 읽은 그녀는 다시 잔을 들어 올렸다.
"인어의 존재에 대해서 들었을 땐 놀랐단다, 알 굴의 바다 아래 있었다고?"
"네, 노예상의 말로는 그렇다더군요. 아마 있다고 해도 인어의 일부 종족이라고 봅니다만…"
알굴의 바다 아래 있으니 그도 우리가 비호해야할 대상 중에 하납니다. 그건 그렇지, 다만 감히 알 굴의 바다를 헤집어 놓은 상대의 처벌치곤 약한게 아닌가 생각하지 않니. 겨우 그런 천박한 이들에게 알 굴의 손까지 쓰는 건 아무래도 그들에게 과분하다고 생각되서, 장소에 있던 인어에게 역할을 주었습니다. …배를 침몰시켜 인어의 밥으로 준거구나, 그래 그 정도의 일로 알 굴의 이름은 아까울지도 모르지. 이번 건으로 인어에게 알굴을 심어주었구나. 잘했다.
"그 인어가 마음에 드니?"
"네, 아주."
데미안의 성정을 잘 알고 있는 그녀가 그의 의중을 헤아려 물으면 긍정의 대답이 들려왔다. 네가 마음에 들어하는 것에 비해, 인어는 널 좋아하는 것 같진 않던데. 좋아하지 않는 것 뿐이겠습니까, 인간이라면 덮어놓고 싫어합니다. 지금이야 제게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어 얌전하지만, 그보다 약했다면 제 목을 베었을 겁니다. 너를 어짜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얌전한거란 말이니? 영리하긴 하다만… 대체 누굴 닮아 제게 칼을 들이밀 존재를 마음에 들이는 건지.
"외람되지만 어머니, 제가 누구를 닮는다면. 당연히 어머니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내탓이라는 거니?"
데미안의 대답에 샐쭉한 눈으로 그를 바라본 탈리아가 물으면, 그가 들었던 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그럴리가요. 그저 어머니께서 제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실 거라고 생각해 꺼낸 말입니다. 거기다 저는 두분의 결합을 원하는 쪽입니다, 할아버지께서 마음에 들어하시고 제게도 아버지시지 않습니까. 데미안의 대답에 탈리아가 눈을 내리깔아 제 앞에 놓인 컵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마음에 염두해둔 사람도 인어에 못지 않다는 것은 저도 익히 알고있었다. 쉽게 넘어올 수 없는 것만을 탐하는 것은 집안 내력인지 뭔지. 쉽게 차지할 수 없어도 포기하지 않는건 아들이 저를 쏙 빼닮은 듯 했지만.
"마음대로 하렴"
"이미 마음대로 하고 있었습니다."
업무를 마치고 돌아온 데미안은 여전히 욕조에서 몸을 담그고 있는 인어를 보았다. 답답하지 않나? 데미안의 물음에 콧방귀를 꼈다. 물에 사는 인어가 욕조가 아니면 달리 있을 곳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긴 했으나 욕조가 아무리 넓다한들 거대 어항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에 데미안의 미간이 좁혀졌다. 거점이라고는 하나 놈들과 같은 시설밖에 제공하지 못한다는 건 제 자존심을 건드는 일이었다. 그러나 인어를 위한 넓은 곳을 만들어주려 해도 인원과 시간을 소비하여 당장은 불가능 하겠지. 결국 있는 것들 중에 강구할 수 밖에 없었는데, 문득 스친 생각에 데미안이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향했다.
"뭔데, 뭔가 있어?"
"수영장…임시로 지내기엔 적당하지 않나?"
데미안의 움직임에 인어가 그를 따라 뭄을 바깥으로 뺐다. 그러나 지상에 똑바로 서있는 데미안에 비해 앉은 자세의 인어가 똑같이 보일리 없었으로 인어가 답답함을 토로하면 데미안이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럴게 아니라 직접 보러가는 것이 좋겠지. 그렇게 말한 데미안이 인어를 안아 올렸다. 그대로 넓은 창을 열어 수영장 앞에 내려선 그가 수영장에 내려다 놓으면 인어가 신기하게 그곳을 바라보았다. 직사각형으로 각진 홈에 물이 가득 차있는 것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그 끝에서 톡톡 물을 건드려 본 인어가 수영장 안으로 들어갔다, 첨벙하는 소리와 함께 물살을 일으킨 인어는 이윽고 다시 고개를 수면 위로 내밀었다.
"마음에 드나?"
"뭐, 바다보다 깊진 않지만-…나쁘진 않네."
욕조나 수조에 갇혀있던 것보다는 훨씬 나아. 그거 다행이네, 네가 지낼만한 곳을 만들기까지만 지내도록 해. 데미안의 말에 인어가 데미안을 보았다. 역시 이 인간 남자는 저를 바다로 돌려보낼 생각이 없어보였다. 하기사 바다 위에서도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여기서 도망쳐도 제 모습으론 도망치다 잡히게 될 것이다. 조금더 확실한 기회를 잡아야 한다.
"왜?"
"…날 데려온 이유가 뭔가 싶어서."
…이유가 필요한가? 날 잡았던 놈은 그랬어, 반반하게 생겨서 수집가들이 좋아할 거라고. 내가 하도 제 말을 듣지 않아선가? 난 이대로 팔려가 관상용 물고기가 되거나, 사람들의 구경거리, 요리 재료같은게 될거라고 말하더라고. 그땐 겁을 주려하나보다하고 넘겼었는데 생각해보니 아주 없을 일은 아니라서. 동료들은 두고 굳이 나만 둔 것도 궁금하고. 그랬군. 감히 제 인어에게 그런 소리를 하다니 이제와 보면 인어의 먹이로 준 것 또한 후한 처벌인 모양이었다.
"네가 마음에 들었으니까."
창고에 처음 도착했을 때 살기등등하게 노려보는 모습이 퍽 마음에 들었거든. 그래서 생각했지, 내 곁에 두자고. 나는 너를 구경거리로 만들 생각도 없고 감히 내 것을 손 데려하는 사람도 없어. 나는 네가 여기 있는 동안 너의 모든 편의를 봐줄거야, 내겐 그럴 능력이 있으니까. 이정도면 좋은 조건이지 않나? 네가 바다로 돌아가도 썩 좋은 꼴은 보지 못할거야, 네가 말했지 않나. 인어는 은원을 잊지않는다고. 그들에겐 너도 마찬가지일거야, 그게 합당하지 못한 분노라도 확실한 은원이지 않나. 바다의 종족이 바다로 돌아가겠다는데 그런게 뭐 중요해? 데미안의 말에도 인어는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그는 여전히 돌아갈 생각을 접지 않은 듯 보였다.
"그러는 너는?"
"내가 뭐."
내가 이름을 가르쳐주었음에도 너는 아직까지 네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지. 여기에 인어가 너 뿐이라곤 하나 이름하나 알려주는 것이 그리 어려운가? 데미안의 말에 인어가 입을 딱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명백히 이 건에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아하는 표현이었다. 그러나 데미안은 이건에 대해선 물러서지 않았다. 네가 정 그렇게 나온다면, 멋대로 부르도록하지. 그제야 인어가 데미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 역시 너를 부를 때가 있을 텐데, 네가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으니 멋대로 지어 부를거야. 데미안의 선언에 데미안을 바라보던 인어가 눈을 깜박이더니 다시 물 안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마음대로 하라는 한마디만 남기고.
"제이슨(Jason)"
인어가 수영장에서 지내게 된 이후로 늘 수영장을 들리던 데미안이 인어를 향해 툭 내뱉었다. 데미안이 있거나 말거나 햇볕을 느끼며 수영장 끝에 앉아있던 인어가 데미안의 목소리에 그를 쳐다보았다. 네 이름이야, 내가 짓겠다고 했잖아. 의아해하는 인어의 모습에 데미안이 설명했다. 제 이름을 되새기듯 중얼거린 인어는 이내 알겠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데미안을 가리켜 '데미안' 저를 가리켜 '제이슨' 이라고 뱉어낸 인어는, 물갈퀴가 달린 엄지와 검를 이용해 동그라미를 만들어냈다.
"원래라면 성씨도 지어줘야겠지만 그건 네가 알아서 정하도록해, 땅 위에서 지내며 땅위의 것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고 생각할 때가 적당하겠지."
너를 소개하는 일이 있다면 좀 곤란해지겠지만 너는 나와 함께 다닐테니 크게 문제가 없을거다. 성이 없다하더라도 네 뒤에 내가 있는데 간크게 네게 뭐라고 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데미안의 이어진 설명에 인어, 이제는 제이슨인, 그는 데미안이 제 이름을 소개할 때를 기억했다. 이름에 몇자 더 붙었던 걸 기억한다.
"또 네게 알릴 것이 있어, 얼마 후에 파티가 있을 예정이고 너도 파티에 참가한다."
"내 의사는?"
당연하듯 제 파티참가 여부를 결정하는 데미안에 제이슨이 불퉁하게 물었고, 데미안이 대답했다. 어짜피 너는 참가하려 하지 않으려 할테니까. 이번 파티는 널 위한 것이기도 해. 너를 잡았던 치-… 노예 상인들의 말을 듣자하니 너희가 처음이 아니었을텐데 흩어진 동족을 찾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나? 놈은 어린 인어라고 말했지, 앞서 만났던것이 언제인지는 모르니 이미 완전히 성장했을지도 모르지. 그야 동족에 대한 것은 아무래도 알고 싶긴 했다. 제 동족들이 저를 원수 보듯하더라도 바다를 그리듯 동족을 그리니까. 거기다 네가 그들을 바다로 돌려주는 일에 나선다면 네 동족들이 널 보는 눈도 바뀌겠지. 합당한 이유가 없는 원망보다는 확실한 근거가 있는 은혜가 될테니까.
네가 만나게 될 인사들은 인간들 사이에서도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 물론 그런만큼 콧대가 높지만 네 뒤에 있을 나를 봐서라도 네게 호의를 베풀거다. 나와 연을 잡으려면 네게 잘 보일 수 밖에 없으니 당연하겠지만, 너는 그걸 편한대로 사용하면 되는거야. 아마 네 동족들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겠지. 물론 네가 동족을 찾기 바란다면의 이야기지만, 나 역시 사람을 풀어 찾도록 할거야. 흩어진 정보를 찾는데 LOA보다 좋은 조직은 없을테니 믿어도 좋다.
"왜 이렇게까지 해줘?"
네가 내게 호의적이라는 것은, 이해는 안되지만 알겠어. 애초에 넌 내가 마음에 들어 끌고 왔으니까 내 처우에 대한건 네가 돌보는게 당연하고. 하지만 보통 그렇다고 네 먹을 걸 내게 준다거나 하지 않지? 네가 소개시켜준다는 인사도 그래, 네가 네 사람이 된다면 모를까 나는 그걸 확실히 거절했고 그저 얹혀사는 삶에 지나지 않아. 그리고 너도 알다싶이 바다로 돌아가는 것 또한 포기하지 않았고. 그런데도 이렇게까지해?
"우리 집안의 내력이라 하면 믿을건가?"
"내력?"
그래, 내력. 멀리 갈것도 없어. 나의 어머니도 제게 언제 칼을 들이밀지 모르는 남자를 사랑하시지, 또한 그분에게 상당히 무르시고. 할어버지도 그 분을 꽤 아끼셔. 우리가 살짝 선을 넘기만해도 경찰들에게 넘겨버릴 사내를 말야. 그 분을 위해 얼마든지 알 굴의 자원을 사용하시지. 너도 그래? 나도 그 사내를 꽤 좋아해, 나야 그럴수 밖에 없지. 나의 아버지시니까. 그런데도 자기 가족들을 그 경찰이라는 사람들에게 넘긴다고? 엄밀히 말하면 가족은 아니지. 어머니와 그 사내는 틀림없이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지만. 아버지는 내가 있다는 사실 조차 몰랐었으니까. 어머니가 혼자 품고 계셨고 혼자 낳으셔서 나를 알 굴의 후계자로 만드셨어. 나는 내 친부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어 그의 도시로 갔고 그제서야 내 존재를 알게되셨지. 솔직히 아직도 껄끄러운 사이야.
"제이슨 네 일도 그래, 네가 처음 이곳으로 왔을 땐 제법 반향이 컸었거든. 어머니가 나를 직접찾아올 정도였으니까. 네가 마음에 든다고 하니 아무말 하지 않으셨지만."
집안의 내력을 떠올리신 모양이지. 원체 부족함 없이 자라서 인가 우리는 우리가 마음에 두는 사람에게 퍼주는 걸 아까워하지 않아, 아니 물러진다고 하는게 맞는 표현이겠지. 오히려 내 경우가 약한 편이야, 어머니는 그를 그의 도시에 그냥 두셨고 나는 너를 이곳에 데려오는 것을 선택했으니까. 내게도 그런 배려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네가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너를 데려온 것 외에 나는 전부 그와 같은 것을 네게 주었어. 조금더 직접적이고 단적인 표현을 하자면 그래,
"나는 너를 「사랑」해."
"…나는 그 표현을 좋아하지 않아, 아니 끔찍히 싫어해."
데미안의 말에 표정을 굳힌 제이슨이 말했다. 그런가? 주의하지. 명백히 거절하는 표현에도 데미안은 담담했다. 그의 거절을 거절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눈치챈 것인지. 그러지 않겠노라고하며 바로 화제를 돌렸다. 그러니 파티를 위해서도 옷이 필요하니 치수를 잴거야. …굳이 옷을 입어야 해? 파티란 격식을 맞추어 가는 곳이야, 네 하반신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상반신은 맞추어야해. 네가 싫어할 것 같아 직접 재겠다고 했으니 잔말말고 이리와.
"자."
"뭔데 이게."
"검, 너도 네 몸 지킬 물건 하나는 있어야지."
데미안의 도움으로 착복을 마친 제이슨에게 데미안아 무언가를 건냈다. 손으로 받아든 제이슨의 물으면 그가 가볍게 대답했다. 제 팔꿈치까지 오는 길이의 단검으로 제이슨이 들기에도 퍽 편안한 무게였다. 요리조리 살펴본 제이슨이 다시금 데미안에게 눈길을 주면 데미안이 이어 답했다. 파티 이야기를 했을 때 네가 불안해 보였어서. 네 무기는 가라앉은 그 배에 있을 테니 적당한걸 준비해봤어. 네가 쓰던 무기에 비해 어떨진 모르지만, 상당히 괜찮은 물건이야. …내가 이걸 너한테 휘두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당해주겠지. 말했잖아, 난 네게 무르다고. …멍청하긴. 뭐 받아는 줄게. 그것 참 고맙군.
"그리고 오늘 올 손님에 대해서다만, 전에 말했던 인물말고 한명이 더 올거야."
"한 명이 더? …다른 종류의 사람?"
"그래, 고담의 배트맨이다."
데미안의 말에 제이슨이 조금 생각한 후 다시 물었다. 제게 명단을 모두 밝히진 않았으니 그가 말한 인물상 외의 인물이리라. 제이슨의 추측대로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또 한사람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고담시를 지키는 자경단이야, 이번에 오는 초대 손님 중 멍청하게 고담시에 손을 댄 녀석이 있던 모양이라. 하지만 배트맨은 초대받지 않은 사람이지? 그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긴 하지. 그렇지만 그는 알 굴의 경호원보다 능력이 좋아서 어지간한 수준의 이들로는 감당할 수 없어. 그리고…알 굴은 그에에 무르지. …뭐? 배트맨, 그가 내 아버지야. 데미안이 밝힌 이야기 제이슨이 숨을 집어 삼켰다. 본인은 담담히 이야긴하나 저 이의 가족사를 제가 들어도 되는지 판단이 서질 않았으니까. …뭐 그가 너에게 날을 세울리는 없지만, 부디 그의 눈에 띄는 일이 없길 바라. 나한텐 위험하지 않단 소리 아냐? 근데 왜? …이유는 묻지마. 그래 뭐, 딱히 마주칠 일도 없을 것 같지만. 데미안의 말에 제이슨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직감적으로 더는 파고들면 안됀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파티는 지루했고 영 성미에 맞지 않았다. 데미안의 도움을 받아 인사들과 인사를 했지만 데미안이 기대하는 효과는 얻기 어려울 성 싶었다. 그래 휠체어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이를 살갑게 대할 리가 없지. 거기다 제가 인어라는 사실을 알자 유우명한 동화라며 제게 책을 건낸 놈은-… 재아슨을 대놓고 무시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곳에 와 동화같은 건 읽지 못했기에 스스럼 없이 받아주었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받아들였을 저를 속으로 얼마나 비웃었을까! 미리 알았더라면 데미안이 준 칼로 그의 다리를 찍어줬을 것이다. 뭐 하는 행동을 보아하니 배트맨이에게든 알 굴의 사람에게든 걸려 죽을 운명이겠지만.
"제이슨!"
제이슨이 책을 덮었을 지음 휴게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데미안이 들어왔다. 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 들어오는 열기와 매캐한 연기에 건물이 불이 났음을 깨달았다. 어쩐지 좀 덥게 느껴지더라니. 휠체어를 사용할 수 있긴 하나 상황을 몰랐을 제이슨을 위해 데미안이 달려온 모양이었다. 얼마나 달렸는지 숨은 가쁘고 얼굴에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데미안이 겨우 그정도로 숨을 몰아쉴 인물인가? 아니, 이것은 필시 제이슨이 심어둔 덫이 효과를 발하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제이슨은 기쁨을 숨기지 않으며 데미안에게 말을 걸었다.
"데미안, 이 책에 대해 알아?"
"더 리틀 머메이드? 오호라, 그놈들 중 하나가 그걸 네게 건넸나보군?"
제이슨이 보여준 책의 제목을 읽은 데미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데미안도 그걸 제이슨에게 준 이유를 쉽게 추측했기 때문이리라. 재밌는건 말이야, 이 책의 내용이 아주 거짓말은 아니라는 거지. 인어의, 아니 우리 종족들에게만 이어지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거랑 비슷한 이야기야. 즉, 여기나오는 인어 공주는 우리 조상이라는 말이지. 내가 왜 널 싫어하냐고? 왜 인어들이 인간을 원망할까? 바로 이 때문이야. 결국 제 사랑을 얻지 못한 인어가 거품이되어 사라지고. 남은 인어는 제 가족을 잃었지. 그 원인이 된 남자를 원망했고, 나아가 인간을 원망했어. 바다 깊은 곳으로 들어가 그와 관련없는 삶을 살았지. 어린 인어들에게 그 이야기가 모두 잊힐 때까지.
"참, 데미안. 얼굴이 많이 안좋아보인다? …내가 준 독은 맛있었어?"
"그게 무슨…!"
그 멍청이들이 네가 날 여기에 두었을 때, 여기 와서 모의 작당을 하더라고. 내가 알아듣는지도 모르고서. 널 죽이겠다고 극독을 가져왔다더라, 제 아무리 알 굴이라도 어쩔 수 없을거라면서 말이야. 그래서 그걸 이용했어. 모르는 척 네게 독이 담긴 음료를 건냈지. 넌 내게 약하잖아, 그래서 의심도 없이 마시더라. 놈들의 말처럼 크게 효과가 있을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통했나봐. 그치?
"데미안, 날 위해 죽어줘."
"…그것만큼은 이루어 줄 수 없어."
왜? 내가 휘두른 칼에 맞아주겠다고 했잖아. 내가 죽으면 널 가질 수 없잖아. 내가 살아있고 네가 내 곁에 떠나지 않는게 그 전제야. 그래? 아쉽네. 그렇게 대답한 제이슨이 딱!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분수에서 물줄기들이 솟아났는데, 제이슨의 손가락을 따라 곧 바로 데미안을 향해 솟구쳤다. 인어가 왜 물가에서 나오지 않을까, 그건 거기가 사는 구역이기도 하지만 가장 유리하게 싸울 수 있는 곳이기도 해. 그리고 네가 날 위해 분수를 만들어 준 덕분에 나도 유리한 상황에서 싸울 수 있지. 전부 네 덕분이야. 네 친절에 감사해.
'푸욱!'
제이슨이 만들어낸 물줄기가 데미안을 습격하자 데미안도 이를 피해 움직였다. 그러나 움직이면 움직일 수록 독이 빠르게 퍼져나갔고, 극독이라 했던 만큼 데미안의 움직임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이끌고 이리저리 피하던 데미안은 결국 제게 날아오는 칼 한자루를 피하지 못했다. 어느새 제게 다가온 제이슨이 제 복부를 찌른 것이다. 자아, 내가 이겼어. 제이슨의 말과 함깨 데미안의 눈꺼풀도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래, 널 데려올 때부터 생각했었지. 넌 기회만 된다면 날 죽이려 들것이라고. 너는 내게 살갑게 대했으나 아주 마음을 열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흐려지는 의식을 붙들고 데미안이 입을 달싹였다. 이번만은 보내줄테니 한번 잘 도망쳐봐.
"멍청한 데미안 알굴, 바보같은 제이슨."
제이슨은 제 아래 쓰러진 데미안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곳에서 아무리 도망쳐도 이 몸으로는 도망치기 힘들 것이다. 도망치는 길에 어떤 놈들에게 주워질 지도 모르지. 하지만, 하지만 그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다. 어중간하게 친절했던 데미안 알 굴의 곁에 있는 것보다는 무엇인들 나으리라. 보다 확실히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면 이대로 떠나야 했음에도 제이슨은 제 팔을 들어 올렸다. 데미안의 배에서 칼을 뽑아든 제이슨은 그대로 제 팔을 그어 피를 내었다. 한 두 방울을 그의 입에 떨어트려주곤 칼을 검집에 넣었다. 저게 제대로 입안에 들어간다면 해독작용을 할 것이고 곧 정신을 차리겠지. 정말로 멍청한 짓이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인어는 은원을 잊지 않으니까."
그렇게 중얼거린 제이슨은 제 칼을 품에 여미고 팔을 움직여 몸을 질질 끌었다. 분수의 물은 이미 데미안을 제압하기 위해 사용한지 오래고 다시 휠체어 위로 올라갈 수도 없었다. 칼로 상처를 낸 탓에 피도 흐르는 데다, 그 칼에 인간의 피가 묻어있었다. 제 몸에 무슨 변화를 일어날지, 혹은 죽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그 편이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제 몸을 질질 끌어 어떻게든 파티장으로 향하면 제 앞에 누군가 섰다. 검은 복장에 키도 데미안만큼 커 제이슨의 몸을 그림자로 다 가리울 정도였다. 누구? …배트맨. 데미안이 말한대로 제이슨은 그를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가슴에 박쥐마크이며 검은 카울까지. 못알아보는 것이 이상한 수준이긴 했다. 배트맨은 제이슨의 차림새를 살핀 배트맨이 말했다. 돕지. 저를 향해 손을 뻗는 배트맨의 손을 받아들일 수 없던 제이슨이 황급히 피하며 소리쳤다.
"휴게실에 당신의 아들이 있어요!"
'멈칫'
제이슨에게 뻗던 손길이 멈추자 제이슨은 두다다 말을 풀었다. 그리고 그 앤 지금 쓰러져 있고, 난 그앨 찔렀죠! 난 걔를 죽이려 들었어요. 그런데도 날 돕겠다고요? 제이슨은 배트맨이 그 손을 얼른 거두길 바라며 외쳤다. 그러나 배트맨은 거두긴 커녕 제이슨에게 뻗었다. 글쎄, 내 생각엔… 그 애가 죽진 않을 것 같구나, 그리고 그 애가 정통한 후계자라면 알 굴에서 그를 죽게두지 않을 거다. 그는 마치 제이슨 안의 죄책감을 읽은 듯 했다, 제이슨 안의 데미안 알 굴에 대한 그 어떤 것을 읽은 것처럼 대답했다. 배트맨은 제이슨의 말을 듣고 결정을 내렸고, 이제 제이슨이 결정을 내릴 차례였다.
"좋아요, 배트맨. 날 데려가요."
난 이제 고향에는 돌아갈 수 없고 여기서 머물기는 더 싫어요. 난 이대로 혼자서 이곳을 벗어나긴 힘들거고 누구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고 당신은 내게 도움을 내밀려하죠. 좋아요 당신의 도움, 받을게요. 제이슨이 배트맨을 향해 손을 뻗자 배트맨이 제이슨을 안아들었다. 네겐 준비가 좀더 필요할것 같구나. 제이슨을 안아든 배트맨은 제이슨을 한 손으로 지탱해 들더니 테이블 보를 하나 빼냈다. 그리고 제이슨의 다리를 둘둘 감아낸 뒤 다시 그의 다리를 받쳐 안정적으로 안아들었다.
"배트맨!"
저택의 밖으로 나가니 제 몸에 딱 달라붙은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배트맨 곁에 날아왔다. 한 명만 온다며. 제이슨은 배트맨과 달리 가슴에 푸른 라인을 새긴 남자를 살피며 말했다. 그들은 모두 잡아 인도해뒀어요 …그런데 그 아이는 뭐죠? 설마 또…! 검은 옷을 입고 제 눈가를 가린 그가 입을 크게 벌리며 호들갑을 떨었고, 배트맨이 대답했다. 오해다, 나이트윙. 뭐가 오핸데요? 당신의 품의 그 아이를 데려왔다는거 ? 아니면 우리가 그 아이와 함께 돌아갈거라는 생각이?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데려가달라고 한거야."
그 남자의 호들갑을 들어줄 수 없어 제이슨이 말을 잘랐다. 데려가 달라고 했다고? 제이슨의 말에 남자, 그러니까 나이트윙은 이제 제이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난 여기 갇혀있었거든. 뭐 취급이 좋긴했지만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어. 왜 어째서? 이유를 묻는 그에 제이슨은 어깨를 으쓱였다.숨겨봐야 곧 들킬 일이었다. 난 인어거든, 노예상선에 잡혔던 걸 데미안이 구해주긴 했는데 데미안이 여기로 데려왔어.
"…데미안이? 그렇담…, 넌 정말 고담에 오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걘 좀 집요하거든. 나이트윙은 데미안을 알고있다는 듯이 말했다. 배트맨처럼 얼굴을 가린 것을 보아 그도 자경단일까? 그럼 데미안도 그런 걸까? 제이슨은 드는 고개를 든 의문을 제 손으로 꺾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기를 벗어나는 일이었다. 이런 의문은 무사히 벗어난 후에 해도 늦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때 데미안은 오롯히 혼자였다. 천장이 쓰러질 때와 같은 것을 보니 그가 정신을 잃은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알 굴이 저를 이런 바닥에 그냥 둘리 없으니까. 다만 제이슨이 저를 떠나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는지 주변에 느껴지는 기척이 없었다. 이르지만 찾으러 갈까, 데미안은 제 몸을 일으켰다. 순간 핑 도는 느낌에 살짝 얼굴을 찌푸렸으나 제가 정신을 잃기전 보다는 상태가 나음을 알 수 있었다. 배를 찔렸으나 이물감은 없으니 뽑아 가져갔을 것이고 그 틈으로 피가 흘렀을터인데 오히려 나은 상횡에 제 몸을 살피니 제 움직임을 막던 독의 부재를 느꼈다. 면역이 되었거나 중화가 되었거나 둘 중 하나이나, 가장 확률이 높은 것은.
"…제이슨."
인어의 피가 해독 작용이 있었는지는 몰랐는데. 데미안은 제 곁에 떨어진 핏방울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더러 죽어달라던 정많은 인어는 결국 저를 죽이지도 방치하지도 못했다. 그래도 두었다면 정말로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게다가 떨어진 핏방울이 제이슨의 행로를 알려 주었다. 이것을 따라가면 그를 찾는 힌트가 될 것이다. 찾아내는 것이 이미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만큼 찾기는 어려울 테지만.
"여기서 멈췄군."
제이슨의 핏자국은 파티장 한 가운데서 멈춰 섰는데, 아마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듯 했다. 바로 곁 테이블의 테이블보가 사라진 것을 보아 그것으로 지혈을 했거나 그의 꼬리를 감쌌을 것이다. 데미안이 자주 안고다니기는 하나 어느정도 덩치가 있어 쉬이 안을 수는 없다. 그리고 파티장에서 인사를 시켰으니 제이슨이 데미안의 것이라는 걸 모를 이는 없었고-… 저와 척을 진 인물이야 오늘 쳐들어왔던 배트맨과도 척을 진 인물이니-… 아, 그런가.
"배트맨의 도움을 받은건가."
결국 그의 눈에 띄인 모양이다. 데미안은 배트맨과 굳이 반목하는 관계는 아니나 배트맨은 약자에게 친절한 편이었다. 바다에 사는 인물을 억지로 데미안이 데리고 있었으니 배트맨의 입장에서는 제이슨을 도울 이유가 충분했다. 배트맨의 도구를 활용하면 바다로 보내는 것이야 식은 죽 먹기겠지. 하…제이슨을 바다에 돌려보냈다면 찾기 어려웠다. 데미안에게 잡힐 우려가 있으니 그들이 보호하고 있다는게 데미안으로서는 훨씬 나았다.
"일단 바다쪽으로 사람을 먼저 풀어야겠군."
배트맨이 있을 고담으로 가는 것은 좀 더 시간이 지난 뒤가 좋을 것이다. 알 굴 역시 제 정비를 해야할 필요가 있었고, 바로 고담으로 찾아간대도 경계만 높아질 뿐이었으니까.
고담의 밤하늘에는 언제나처럼 배트시그널이 떠있었다. 이 도시는 여전히 배트맨을 필요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데미안 역시 배트맨에게 용무가 있으나 지금 고담을 활보하는 배트맨은 아니었다. 지금의 배트맨은 저의 아버지의 로빈이었던 팀 드레이크라는 인물로 제 외조부가 드물게 흡족하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도 아예 배트맨의 활동을 은퇴한 것은 아니라 데미안 같은 불청객이 고담에 나타나면, 이렇게 제 모습을 드러내곤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아버지."
"네가 여긴 무슨 일이지?"
"…아들이 아버지를 보러 오는 것도 이유가 필요합니까?"
그는 오늘도 혼자 등장하지 않았는데, 배트맨의 곁에 선 나이트윙이 데미안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친근한 아는 척이었지만 데미안은 가볍게 그것을 무시했다. 데미안의 인사에도 용건을 묻는 배트맨의 모습에 나이트윙이 제 머리를 짚었다. 확실히 오랜만에 만나는 부자가 취할 행동은 아니긴 했다만, 데미안도 배트맨 만큼이나 살가운 성격이 아니라 오히려 그 편이 편했다.
"네가 정말로 그런 용건으로 왔다고 한다면, 나 역시 너를 반길 것이다."
배트맨이 돌려준 대답은 마치 제가 다른 볼일이 있어 오는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맞았다. 데미안은 알 굴의 바다에서 찾지 못한 제 인어를 찾으러 고담을 찾은 것이니까. 그는 배트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너스레를 떠는 것보다 그 편이 빠르리라. 나는, 당신이 데려간 내 인어를 데리러 왔습니다. 인어? 네. 그 동화책에 나오는 그? 네, 책과는 달리 남성형이지만.
"뭔가 오해가 있군, 난 인어를 본 적이 없어."
"파티가 있던 날, 오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불청객이지만 그날 알 굴을 찾아갔지. 하지만 인어는 본적이 없어,"
"거짓말!"
"그-, 데미안?"
배트맨을 몰아붙이려는 데미안과 배트맨의 사이로 나이트윙이 끼어들었다. 배트맨의 첫번째 로빈이었던 그는 상당한 실력자로 데미안도 쉽게 여길 상대가 아니었으므로 그의 저지에 뒤로 한발자국 물러서자. 한숨을 내쉰 나이트윙이 말했다. 그 파티가 있던 말 말인데, 배트맨이 한 말은 사실이야. 나도 그 날 같이 갔거든. 당신도? 그래, 배트맨이 다른 정황이 없나 건물을 도는 틈에 내가 그놈들을 경찰에 인계했지.
"애초에 우리가 인어를 데리고 갔다고 하더라도 고담에 풀어놓을 수도 없잖아, 고담의 하수도는 좋게 말해도 깨끗하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근처 바다에 풀어주지 않았을까? 오히려 우리가 데리고 있는 편이 더 위험하고. 나이트윙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나이트윙의 성정을 생각하면 일부러 능청스러운 연기로 자신을 속여넘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그의 곧은 성격의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조금이라도 침묵이 생기겠지. 그렇다면 정말로? 물론 바다는 넓어 찾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알굴의 바다가 아닌 곳에 풀어줬을 수도있을 것이다.
"좋습니다, 일단 돌아가기로 하죠."
심증만으로 그들을 몰아치기에는 어려웠으므로 데미안은 일단 물러서기로 했다. 고담이라고는 하나 아예 자신의 눈길을 피할 수는 없으니까. 고담안에 꽁꽁숨겨두었더라도 어짜피 그의 손에 들어 올 것이다.
"인어를 본 적이 없다고요?"
데미안이 자취를 감춘 후 나이트윙이 배트맨에게 말을 걸었다. 말투로 보아 배트맨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이 섞여 있었다. 그 눈길을 받은 배트맨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내가 본 그 애는 이미 사람의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나는 꼬리 지느러미를 가진 인어는 본 적이 없다 사람의 다리를 가진 인어를 보았지."
그러나 데미안은 꼬리를 가진 인어를 묻지 않았나. …당신답지 않은 말 장난이네요. 아주 뻔뻔스러워요. 나이트윙은 그리 말하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거짓말은 나쁘지만, 제이를 위해 특별히 용서해드릴게요. …언제부터 그 애의 애칭을 부르게 된거니? 어 꽤 됐는데, 그 애가 허락한 건 아니지만요. 그 애를 너무 자극하진 말렴. 아끼고 있는 건데. 배트맨이야 말로 그 애를 위해 거짓말까지 하다니 의외인데요.
"…그 애가 회복하는 날까지 지키기로 했으니, 그에 따를 뿐이다."
3.딕슨<바다와 소년> 19,987/26,211
제이슨은 육지에 관심이 많은 인어였다. 누구든 자신이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지만 제이슨의 육지에 대한 관심은 한층 더 각별했다. 제이슨이 살고 있는 바다는 육지와는 조금 동떨어져, 둥글게 튀어나와 인어들이 자주 쉬고 하는 바위 섬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이따금 그 옆을 항로로 지나가는 인간들의 배가 유일한 손님으로 인어들은 언제나 그들을 극진히 모셔왔다. 그들이 자랑하는 노래로서.
인간들이 말하는 인어의 바위에 앉아 목소리를 모아 노래를 부르면 당연하게도 인간들의 배가 접근해왔다 그러면 주변에 숨어 있던 암초에 부딪혀 큰 상처를 입고 침몰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탑승하고 있던 인간이 어떻게든 도망치거나 물살에 휩쓸리거나 하면 남은 물건들을 인어들이 주워가는 식으로 일종의 전리품과 마찬가지였다. 인어들이 아주 싸우는 법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인간이 상대일 경우 이렇듯 노래를 불러 홀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인어들이 주운 재화는 어린 인어들의 놀잇감이 되었는데 제이슨도 그 중에 하나였다. 다만, 제이슨에게는 그것을 주워줄 부모가 없었기에 그의 몫은 한 없이 적었다.
뭐 그것이 제이슨이 육지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계기가 되기는 했었다. 제이슨이 남들보다 더 가지기 위해서는 배가 오는지 오지 않는 지부터 알아야 했고 제이슨은 무리를 몰래 벗어나 항로 근처를 살피게 되었다. 그리고 제이슨은 바다 위를 지나는 커다란 배의 위용에 압도되었다. 무엇보다 갑판 위를 뛰노는 아이들이 눈에 띄었다. 곁에는 언제나 부모가 곁에 있는게 인어들과는 좀 달랐으나 퍽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제이슨은 제게 없는 모습을 대리만족하듯 그것을 바라보는 목적으로 바다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날도 크게 다르지 않은 날이었다. 바다 위로 올라와 근처의 바위들 틈에 숨어 언제나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여느때와 같이 커다란 범선이 모습을 들어냈다. 조금 떨어진 곳임에도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 자세히 살피면 단란한 가족들이 난간 가까이 서있었다. 아이는 응석부리는 것이 익숙한 듯 어미에게 매달렸고, 아비는 그것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몇번이고 보았던 관경이었으나 볼때마다 부럽기 그지 없는 환경이었다. 인어들은 모두 제이슨의 형제자매가 되어주었지만 오롯히 그의 가족으로 있어주는 것은 아니라서, 그래서 저런 풍경에 더욱 눈이 가게 되었다. 어미에게 안겨 까르르 웃던 아이는 뭔가 발견한 듯 고개를 돌리더니 어딘가로 손을 흔들었는데. 그 방향이 제이슨의 쪽이라 깜짝 놀랐다. 주변에 다른 무언가 있나 살펴도 그런 것은 없었고 놀라 제 몸을 숨기자 아이의 표정이 풀이 죽었다. 명백히 제이슨을 향한 인사였다.
이전에도 제이슨을 발견한 사람들은 몇몇 있었다. 바다 속에서 상반신만 들어낸 제이슨을 흥미롭게 보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제이슨의 정체를 안 사람들의 얼굴은 금방 두려움으로 번했다. 간혹, 제이슨이 혼자인 걸 아는 이들은 제이슨에게 무언가를 던지기도 했다. 전부 받아쳐주거나 피해주었지만. 다만 이렇게 인사를 해준 것은 처음이라, 처음으로 겪어보는 인간의 호의라 조금은 들뜬 것 같았다. 그러니 답지 않은 선택을 한 것이다.
'쿵!'
어린 인어의 힘이 강해봤자 얼마나 강하겠는가, 인어 한 명의 힘은? 그런것 뻔히 알고 있는데도 범선의 항로를 바꾸고자 선두와 몸을 부딪혔다. 인간들은 모르지만 저대로 가다간 '인어의 바위'에 도달하고 만다. 그렇게 된다면 제 아무리 이 커다란 범선이라고 해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단단한 만큼 더 좋지 않을 꼴을 볼지도모르지. 정말로 웃기는 일이다, 제 앞 길조차 잘 가리지 못하는 제가 타인을 걱정하여 이렇게 말도 안돼는 짓거리를 벌인다는게. 단란한 가족을 보는게 처음인가? 아니. 그때도 이렇게 노력했나? 아니. 제이슨은 그저 인어의 바위로 가는 이들을 지켜만 봐 왔다. 어찌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으니까.
'인사를 해주었으니까야.'
인사 하나 쯤 대단한 일도 아니었지만 제이슨은 거기에서 인간의 호의를 처음으로 맛보았다. 아이는 저만 인사한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도 인사하기를 청했고 부모는 어쩔 수 없이 따라 인사를 건냈다. 물론 제이슨은 손 따위 흔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제이슨은 도리를 아는 인어였다. 호의에는 호의로. 물론 받은 것에 비해 이것은 과하기 그지 없는 행동이었지만, 실제 효과는 미미하니 같은 셈 치기로 했다. 꿈적도 하지 않네. 몇번이고 부딪혀 봤지만 배는 꼼작도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래선 의미가 없어. 그러고보니 배의 말미에 뭔가 지느러미 같은 것이 있었던거 같은데. 제이슨은 그간의 기억을 뒤져 방법을 모색했다. 배 전체가 아닌 지느러미 부분이라면 제이슨도 어떻게 할 수 있으리라. 그리 생각하며 선미로 향했다. 빙들빙들 돌아 소용돌이를 만드는 장치 뒤로 작은 지느러미가 보였다. 저걸 굽힌다면 방향을 바꿀 수 있으리라. 다만 소용돌이가 있어 힘들것 같은데-…할 수 밖에 없겠지.
"앗, 위험해!"
제이슨이 배의 지느러미에 도달할 무렵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는지 앳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드니 그 때의 그 아이가 걱정스럽게 제이슨을 지켜보고 있었다. 들켰다? 몰래 하려 했던 것은 아니나 별로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었다. 순간적으로 딱딱히 굳은 몸은 금새 소용돌이에 밀려 떠내려갔다. 물살의 세기에 제가 얼마나 쉽게 생각했는지 체감했다. 저 소용돌이를 뚫고 방향을 트는건 불가능한 일이다. 다시 선두를 밀러 갈까? …아니, 그만두는게 좋겠다. 제가 무슨 짓을 하고 있단 걸 이미 아이에게 들켰다, 아이야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이라면 방향을 틀려 했다는 것을 알겠지. 인간들의 인어에 대한 인상은 썩 좋지 않으니 인어의 바위로 데려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다른 인간들의 생각이야 아무래도 좋지만, 제게 인사를 건내던 아이의 얼굴이 변한 것은 그리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 어쩌면 괜히 제이슨을 의식해줘서 더 틀어버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아이의 운명이이라.
제이슨은 제가 이렇게 포기를 못하는 인어일 줄은 몰랐다. 그렇게 스스로 다독인게 언젠데 어른들의 무대에 맞추어 수면 위로 나왔던 것이다. 인어의 바위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자리한 제이슨은 조용히 예의 배를 기다렸다. 해가진 덕분에 어둑어둑했으나 배 안의 불을 서고 있으니 선명하게 그의 형태가 보였다. 배가 다가오는 것이 눈에 보이자 인어 형제자매들이 목소리를 한 데 모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랫말은 없지만 그저 소리를 모으는 것 만으로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냈다.
"아-아아- 아-♪"
바위 섬을 지나쳐가려던 배는 이윽고 방향을 틀어 바위 섬으로 향했다. 바닷 바람이 없어 동력으로만 움직이는 배는 천천히 바위섬에 다달았다. 본래대로라면 적당한 거리에 멈춰 보트를 이용해야겠지만 배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배가 그래왔듯 아무것도 모른채 바위섬으로 향했다가 암초에 충돌해 가라앉겠지. 제이슨은 그 모습을 지켜볼수 없어 눈을 감았다. 으윽고 쿠웅하는 둔탁한 소리가 바다 아래서 울렸고 제이슨 눈을 떴다.
갑판 위에 아이와 부부는 없었다. 아마 선실이라는 곳에 있을 것이다. 암초와 부딪힌 부분에 구멍이 나 물을 채울 테니 제이슨은 그 틈을 노리면 되었다. 바닷물이 급하게 들어가겠지만 제이슨이 헤엄칠 정도는 아니겠지, 그리고 동료인어들의 시선도 피해야했다. 물에 들어가 상황을 살핀 제이슨이 재바르게 배 안으로 침입했다. 남들보다 덜먹어 마른 몸은 재발라 이럴 때 좋았다. 배 안에 어느정도 차오른 바닷물을 가르며 그들을 찾았다. 엄마아! 어미를 부르는 소리가 낮이 익다.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문을 열면 차오르는 물에 겁을 먹고 어미에게 안겨든 아이와 부부가 보였다. 이, 인어…! 아니나 다를까 아이를 끌어안은 두 부부가 제이슨을 보고 경계 했다. 그러나 그들의 경계가 풀어질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빨리-…!"]
인어의 목소리는 힘을 가진다, 보통은 노래를 부르며 발휘되지만 말 자체에 아주 힘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강제하는 것을 썩 좋아하진 않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목소리가 닿자마자 그들이 제이슨쪽으로 따라 움직였다. 밖으로 탈출할 거야, 잘 따라오라고. 그렇게 말한 제이슨이 앞섰고 아이를 안은 부부가 제이슨을 따랐다. 배를 나가는 길은 들어가는 만큼 쉽지 않았다. 지금은 어느정도 침몰이 진행되었기도하고 인어들이 본격적으로 노략을 하기 시작할 즈음이었으니까. 더군다나 인간 둘을 눈치 채이는 일 없이 빼돌리는 것이 상당히 어려웠다. 결국 돌아돌아 나가게 되었지만, 제이슨은 어떻게든 그것을 이루어내었다.
"푸하!"
수면위로 올라 온 부부가 숨을 내뱉었다. 딕, 괜찮니? 결국 숨을 마저 참지 못했던 아이가 콜록콜록 기침을 내뱄었다. 안고 헤엄쳤던 부부에 비해 덜하겠지만 그래도 어린 인간이니 견디기 힘들었겠지. 겨우 기침을 가라앉힌 아이가 눈물이고인채로 웃었다. 네, 괜찮아요 엄마. 아이의 무사를 확힌한 어미가 제이슨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때도 저흴 구해주려 했던 거로군요. 저흰 그것도 모르고. 제게 사과하는 부부에 제이슨이 당황해 소리를 내려다 겨우 멈추고 고개를 내저었다. 오해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방금 전 인어들이 이 부부에게 하려했던 일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당신이-… 우리를 구하기 위해 무리했다는 건 압니다, 그러나 당신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우릴 구해주신 분, 당신의 상냥함을 믿고 부탁드립니다. 딕을…아이를 부탁드려요."
…엄마? 아이가 저를 떨어뜨리려 한다는 것을 느낀 것인지 불안하게 어미를 불렀다. 나의 울새, 피곤하진 않니? 어미는 아이를 사랑스럽게 보며 도닥였다. 아이의 신경이 어미에게 쏠려있는 것을 확인한 아비가 제이슨에게 말했다. 수면까지 나온 것으로도 많이 나아졌지만 이 상태로 육지로 도달하는 것도 힘들겠죠. 아무리 당신이라도 일가족 전체를 옮기는 것은 무리일 겁니다. 그러니 부디 아이만이라도 부탁드립니다.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주세요. 싫어요! 난 안갈거예요! 쉬이이, 착하지. 오히려 딱 들러붙는 아이를 어미가 달랬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의 등을 도닥이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멀리서 퍼지고 있는 인어의 노래와는 조금 다르지만 이것 또한 아름다운 노래였다.
"…부탁드려요"
갑작스러운 상황에 지쳤던 건지 어미의 노래에 아이가 잠이 들었고, 잠든 아이를 떼어 제이슨에게 내밀었다. 아이라곤하다 제이슨과 비슷한 크기라 좀 버거웠다. 왔던 저희 배가 왔던 방향으로 되돌아가면 육지가 있었어요, 부디 그곳이라도. 이 바다를 떠난적 없는 제이슨을 생각해준 것인지 아니면 갈급한 마음에 근처에 있는 육지를 입에 담은 것인지 아이의 아비가 말을 덧붙였다. 제이슨은 굳은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만한 아이를 데리고 육지로 떠나는 것은 퍽 힘든 일일 것이며 어쩌면 형제자매들에게 들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제이슨 역시 아이가 무사하길 바랐다. 가능하다면 일가족 모두 살아있는 것이 아이에게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아이만이라도.
제이슨은 아이를 안고 헤엄쳤다. 중간에 아이가 힘들지 않도록 쉬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 만한 덩치를 안고 움직이는 것은 상당히 힘들었지만 아이를 바닷속에 오래둘 수 없었다. 그렇게 달린 결과 제이슨은 어떻게든 육지에 도달할 수 있었고 아이를 물이 닿지 않는 모래사장 안쪽까지 옮기고 나서야 겨우 숨을 돌렸다. 덕분에 제이슨의 몸에는 모래알들이 더덕더덕 붙었지만 제이슨은 그래도 이것을 해낸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아이를 살폈다, 아이의 몸은 오랫동안 물에 있어선지 차가웠다. 처음엔 조금 더 따뜻했던 것 같은데-… 제이슨은 인어라 인간에 대해 알지 못했지만 누군가의 도움이 확실했다. 걱정마, 내가 반드시 사람을 불러줄게. 아이가 정신을 잃은 덕에 제이슨은 스스럼 없이 입을 열었다. 혼자선 아름다운 인어의 하모니를 만들수 없으니 최근에 들었던 아름다운 노래를 따라 부를 생각이었다.
"twinkle twinle little star How I wonder what you are…"
경황이 없는 상태에 겨우 한 번 들은 곡이라 완전하진 않지만 제이슨 열심히 불렀다, 제 형제자매가 멀리서 보이는 배들을 불러오듯 지금은 보이지 않는 이곳의 인간을 불러오기를. 그런 바람을 담아 불렀던 것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 시야의 저 끝에서 사람의 인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 조금만 더 가까이. 너무 가까워선 제이슨이 몸을 숨길 시간도 벌지 못할 것이라. 그들이 적당한 거리에 다가서자 제이슨은 곧 바로 바다로, 아니 바닷가의 큰 바위 뒤로 제 몸을 숨겼다. 자신들을 끌어당기던 노래가 뚝 끊기자 정신을 차린 두 인간은 갑작스레 변한 주변 환경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아것 참… 뭔가에 홀린 기분이네요, 알프레드."
"기우군요, 저도 그렇답니다. "
하지만 누군가 저희를 이곳으로 끌여들였다면 뭔가의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면-… 저기에 누군가 쓰러져 있군요. 오, 이런. 아직 어린 아이 같습니다만. 함께 온 두 사람 중, 조금 늙은 쪽이 더 넓게 주변을 살피더니 모래더미 위의 아이를 가리켰고, 두 남자는 서둘러 아이의 곁으로 다가갔다. 젊은 남자가 무릎을 구푸려 아이의 맥을 살피고 한숨을 내쉰다. 다행히, 아직 살아 있어요. 아무래도 아이를 저택으로 데려가야겠어요, 알프레드. 좋은 생각이십니다, 브루스 주인님. 노인이 아이를 안아들려하자 만류한 젊은 남자가 아이를 양 손으로 안아 들었다. 다소 어색한 것은 노인이 자세를 잡아 주었다.
"그런데, 이 아이 어디선가 본적 있는 느낌이군요. 이런 아이가 있었나요?"
"얼마전에 고담을 떠난 할리 서커스단의 그레이슨 부부의 아들입니다."
기억나지 않으신가요? 오, 그러고보니 기억이 나는것도 같아요. 아직 어려 고난도의 기술까지는 따라하지 않았지만 곡예를 보이는 것이 인상이 깊었었어요. 하지만, 그 부부의 아들이라면 왜 여기에-…아. 아무리 덩치가 있다곤 해도 아이는 어른보다는 가벼우니까요, 운좋게 조류를 타고 여기에 도달했을지도 모르죠. 제 생각엔 누군가 아이를 이곳에 데려온 것 같아요, 여기에-…
"브루스 주인님."
젊은 남자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아이 주변의 흔적을 가리키며 제 추측을 말하려는 남자의 말을 노인이 끊었기 때문이었는데, 노인은 남자의 팔에 안긴 아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일의 우선 순위는 아이가 먼저인게? 도련님이 추리를 계속하고 싶으시다면 제게 맡기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요. 오, 아뇨. 제가 들겠어요. 남자와 노인은 해변을 뒤로 하고 돌아갔고 남겨진 제이슨은 다시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의 모습이 당장이라도 흔적을 쫓아 자신에게 올것만 같았으니까. 타인을 구하는 일도 참 피곤한 일이구나. 아까의 남자가 저를 찾아 올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바로 여기를 떠나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하지만,
"…좀 더 지켜볼까?"
아이를 주워간 두 남자가 좋은 인간들인지도 모르겠고, 아이가 눈을 떠 멀쩡한 모습을 보아야 안심하고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어짜피 무리에서 상당히 벗어난 제이슨을 무리는 찾지 않을 것이고, 돌아가봤자-… 저를 동료로 취급해줄지도 의문이었다. 무리생활을 즐겨하는 인어들은 그만큼 규율이 까다로웠다. 그래서 후회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지만.
눈을 뜨니 딕은 화려하고 낯선 천장이 저를 반기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떻게 된거지? 배가 갑자기 흔들리고, 바닷물이 차기 시작할 때 작은 인어의 도움을 받아 배를 벗어난 것까지는 기억했다. 엄마아빠가 저를 인어에게 부탁하는 듯한 말을 듣고 떨어지지 않겠다며 들러붙었고 엄마가 저를 달래듯 노래를 불러주었던 것도. 아마 그 길로 잠이든 모양이었다. 그럼 저는 인어의 손에 맡겨진 걸까? 그럼 여긴 인어가 사는 곳일까? 꿈결에 아주 아름다운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은데. 기억을 더듬으려 눈을 감으면 새가 지저귀는 소리만 선명히 들려왔고, 그 순간 딕은 이곳이 바다가 아님을 직감했다.
'똑똑똑'
노크 소리에 눈을 뜨고 소리가 난, 문을 바라보면 그 문을 열고 들어온 늙은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노인은 딕과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사과했다. 오, 이런 깨어나셨군요. 깨어계신 줄 알았다면 대답을 기다릴 것을 그랬습니다. 노인의 움직임은 꼭 언젠가 보았던 부자들의 움직임 처럼 기품있어서 공연히 저와 멀어보였다. 이럴 때 엄마아빠만 있었더라도, 하다못해 그 작은 인어만 있었더라도 긴장이 덜 될텐데. 딕은 이불을 쥔 손에 힘을 더하며 물었다. 누구세요?
"이거 실례했습니다. 저는 이 저택의 집사 알프레드 페니워스라고 합니다. 편하게 알프레드라 불러주십시오."
"저는 딕… 리처드 그레이슨이예요."
노인의 인사에 따라 딕이 자신을 소개하면 노인이 옅게 웃었다. 할리 서커스단원 그레이슨 부부의 아드님이시죠? 네, 네! 엄마아빠를 아시나요? 안다고 하기보다 여긴 얼마전에 두 분께서 공연하셨던 고담이랍니다. 도련님의 곡예 또한 저희 주인님께서 인상깊게 보셨지요. 오, 그렇군요. …혹시 엄마아빠가 어디 있으신지 알고 계신가요?
"두 분에 관해서는 애석하지만, 알지 못합니다. 저희가 해변에서 발견한 건 도련님 뿐이었습니다."
"…그래요?"
혹시나 인어에 대해서는 아는지 물어보려했는데, 저 밖에 본 적이 없다고 하니 인어 또한 모르겠지. 게다가 인어에 대한 선원아저씨들이나 어른들의 반응이 썩 좋지 않았었고. 섣불리 그 아이에 대해서 하지 않는 게 좋으리라. 딕이 입을 다물자 이번엔 노인, 알프레드가 조용히 물었다. 실례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알프레드는 딕이 그날 일을 기억하고 있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하긴 딕이 알프레드에게 물었던 것은 엄마아빠와 떨어진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아이의 물음에 가까웠으니까.
"그 날이라 하면, 배가 바다에 빠졌던 날을 이야기하는 거죠? 전 그날에 대해 자세히 아는 건 없어요, 선실 안에만 있었거든요. 선원 아저씨들이 말하길 어떤 바위에 가까워 지기때문에 선실에 숨어 있으라고 했었거든요. 그래서 엄마아빠랑 선실에 있었어요. 아, 하지만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어요."
"그건 아마 세이렌의 노랫소리 일거다."
알프레드와의 대화 중에 끼어든 또 다른 목소리에 딕이 고개를 돌리면, 젊은 성인 남성이 거기에 서있었다. 검은 머리에 푸른 눈의 사내는 딕이 봐도 퍽 잘생긴 편이었다. 브루스 주인님? 돌아본 것은 딕 뿐만 아니라 알프레드도 마찬가지여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가 불쾌한듯 남자를 불렀다. 그의 눈살에 못이긴 남성이 옆으로 밀어둔 문 위를 가볍게 두드려 노크했다. …다음부터는 부디 방에 드시기 전에 꼭, 해주시길 바랍니다. 네, 명심할게요. 남자도 알프레드에겐 어쩔 수 없는지 그러겠다고 대답한 후에야 눈길을 벗어날 수 있었다.
"소개하지요, 리처드 도련님. 이분이 이 저택의 주인이신 브루스 웨인 주인님이십니다."
"리처드 그레이슨이예요. 딕이라고 불러주세요"
딕의 소개에 남자가 어색하게 말을 돌려주었다. 브루스 웨인이란다. 몸은 좀 어떻니? 남자의 질문에 딕이 알프레드를 살피자 알프레드가 말을 덧붙였다. 브루스 주인님께서도 같이 발견하셨습니다, 도련님을 옮겨주신 것도 주인님이시죠. 제가 하겠다고 했는데도 부득불 본인이 하시겠다고 하셨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알프레드의 말에 딕이 감사의 인사를 전하니 남자가 놀라 손사레친다. 괜찮단다. 그저 어린 아이가 그곳에 쓰러져 있는 걸 그냥 둘 수 없었던 것 뿐이니까. 나도-… 어릴적에 부모님을 여의였거든. …오, 그렇군요.
"세이렌이란, 노래를 불러 홀리는 인어들을 말하는 거란다. 고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인어의 바위'에서 볼 수 있지. 아마 선원들이 말한 것도 이 바위일거다."
신화 속 세이렌들 처럼 사람을 홀려 죽인다고 그런 이름을 붙였지. 다른 인어들과 헷갈리지 않도록 구분하도록 붙인 이름이다만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어. 어째서요? 발견된 인어들은 세이렌 밖에 없었거든. 그래서 보통 바닷길을 통하는 사람들에게 둘러가라고 조언을 하지만 이번에도 그러지 않은 모양이구나. 귀를 막아도 소리가 완전히 차단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벗어날 수 없는데도. 지는 안타까운 얼굴을 하며 중얼 거렸다.
"네 부모님의 일도 유감이구나."
브루스가 꺼낸 말에 딕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 그래. 저는 부모님과 잠시 헤어진 것이 아닌 부모님을 여읜 것이란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아직 제대로 추스리지 못한 네게 조급하게 들릴 수 있겠다만, 내 아들이 되지 않겠니? 네? 네 아버지의 자리를 빼앗아 갈 생각은 없단다. 하지만 너는 어리고, 부호자가 필요해. 그리고 나는 아주 멋진 보호자가 될 순 없겠지만 네 슬픔을 공감해 줄 수는 있을 거야. 우린, 같은 슬픔을 가진 사람이니까.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딕이 어렵게 꺼낸 말에 브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내게 당장 대답해달라는 의미는 아니었단다. 네가 준비가 되었을 때 말해주렴. 그동안은 편하게 지내길 바란단다. 그렇게 말한 브루스가 먼저 자리를 떳고 알프레드 역시 혼자 있기를 호소하는 딕을 위해 내 온 음식을 협탁 위에 두고 방을 나섰다. 너무 식기전에 드십시오. 작은 당부를 하고선 딕이 거슬리지 않도록 살짝 문을 닫고 떠나는 것에 그의 배려가 느껴졌다.
조금 갑작스러웠다. 양자도, 부모님의 상실도. 솔직히 딕은 아직 부모님의 상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그 밤, 그 날의 저는 어떻게 해서든 엄마아빠에게서 떨어지지 않고자 했었는데. 이별을 직감했음에도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 혹시 너무 편한 곳이라 그럴까싶어 딕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제가 입고 있던 옷은 고급스럽지만 어딘가 낡아보이는 잠옷을 걸치고 있었다. 척보아도 값비싸보이는 옷에 조금 망설였지만 그대로 창문을 열었다. 창문 가까이 나뭇가지가 있는 것을 확인한 딕이 뛰어내려 그것을 붙잡았다. 탁, 알맞게 손에 들어온 가지에 의지하여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이대로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은 무리라 팔을 움직여 나무줄기에 매달려 타고 내려왔다. 거친 나무에 손에 생체기가 났지만 별로 중요한건 아니었다. 이런것 쯤은 연습할 때도 자주 있던 일이었으니까.
딕은 익숙하게 담을 넘어 아까 봐두었던 바다가 있던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해변의 끄트머리에 있는 돌무더기는 파도에 부드럽게 닳아 있어 맨발로 밟고서도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 바다를 눈 앞에 두고서야 딕은 움직임을 멈추고 주저 앉았다. 제 기억이 맞다면, 이해하는게 맞다면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것은 인어일 것이다. 그를 불러야해. 그런 마음으로 이곳에 왔지만 안타깝게도 딕은 그 인어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인어라고 부르기에는 근처의 다른 인어가 나타날까 두려웠다. 결국 쉽사리 입을 떼고 있지 못하고 주저 앉아 있자니 딕의 마음이 통했는지. 철싹하고 작은 파도가 일더니 어린 인어가 모습을 들어냈다.
아, 이런 얼굴이었구나. 멀리 있어서, 엄마를 바라보느라 제대로 보지 못한 어린 인어의 얼굴을 보니 그제야 실감이 나버렸다. 이제 더이상 두 사람을 만날 수 없구나. 눈물이 주룩 흐르자 어린 인어는 당황한듯 제 곁으로 다가왔다. 바위 높이의 차이가 있어 뻗은 손으로 발등을 도닥여주는게 전부였지만. 어쩐지 그것도 눈물이 나서 더욱 목놓아 울자 어린 아이는 당황해서 공증에 팔을 휘저었다. 그렇게 당황스러우면 소리 하나라도 낼법한 데 인어는 끝까지 소리를 내지 앉았다. 엄마가 보고 싶어. 겨우 꺼낸 진심에 인어의 움직이 딱 멈추었다. 그리고 조금 망설이듯 입을 어물거리던 인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Twinkle twinkle little star-…"
인어가 내뱉은 소리는, 노래는, 딕이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들었던 자장가였다. 엄마를 보고 싶다는 딕의 마음에 응해 그가 알고 있는 엄마의 노래를 불러주는 것이겠지. 흔하디 흔한 노래였으나, 어디선가 이 목소리로 이 노래를 한 번 들어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 들었더라? 조금 더 들어보면, 조금만, 조금만 가까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 노래가 뚝 멈추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저는 바다 아래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고 어린 인어는 제가 빠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고 버티고 있었다. 아. 그제야 몸을 뒤로 하면 겨우 힘을 뺀 인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였다. 별안간 주먹만한 돌맹이가 날아와 인어의 머리를 쳤다. 충격에 기우뚱하던 인어는 기어이 어딘가 다쳤는지 피가 흐르고 있었고 뒤이어 돌 두어개가 날아왔다. 다행이 다른 것은 맞지 않았지만.
"뭐하는 짓이예요!?"
울컥 솟은 화에 딕이 벌떡 일어서 뒤돌아 보면, 낮부터 술을 거나하게 마셨는지 붉은 얼굴을 한 남자를 보았다. 뭐어야, 넌? 사람이 구해준 줄도 모르고 어디다 어어른한테 소리를 쳐?! 누가 구해달라했어요? 왜 아무 잘못도 없는 애를 쳐요?! 이놈이 그런데!? 어-디서 인어의 편을 들어! 아, 알겠다. 네 녀석 인어들의 앞잡이구나! 그래 그런게 틀림없어! 너도 같이 혼내주마! 비틀거리는 몸으로 다가오는 남성에 딕이 슬쩍 뒷걸음치면 뒤어부터 물벼락이 떨어졌다. 촤아악 단번의 세례에 옷이 폭삭 젖은 남자는 이내 딕의 뒤쪽 제게 물 세례를 한 인어에게 눈길이 향했다. 오냐, 인어새끼 니가 네 명을 재촉하는 구나!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남자가 팔을 걷어 붙이려 할 때 남자의 뒤쪽 저 멀리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딕!
고개를 들어 보면 브루스가 달려오고 있었다. 아마도 딕의 부재를 눈치채고 찾으러 다녔는지 이마에 땀이 맺혀있었다. 웨, 웨인씨?! 주정뱅이 남자도 브루스를 알아봤는지 얼굴이 새 하얘졌다. 그리고선 브루스와 딕을 번갈아 보다 언제 그랬냐는 듯 웃는 상으로 얼굴을 바꾸었다.웨인씨가 여기까지 무슨 일로…? 제 아들을 찾으러 왔습니다. 아, 아들이라뇨? 웨인씨는 독신이신게-…. 양자를 들일 생각입니다. 브루스가 딕에게 눈길을 주며 말하면 바로 상황을 이해한 남자가 손을 비볐다. 이야아, 그랬군요. 아드님이 아주 큰일날뻔 했습니다!
그 빌어먹을 인어가 아드님을 데려가려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아이가 바다에 빠지는 걸 그대로 둘수 없어서 나셨죠! 그게 웨인씨의 아드님이실줄은 몰랐습니다만. 순 거짓말쟁이. 손을 비비며 브루스에게 설명하는 주정뱅이의 모습에 딕이 볼을 불퉁였다. 슬쩍 뒤를 살펴보니 저를 보호해주던 어린 인어는 또 어디론가 모습을 감춰버렸고… 브루스는 제 후견인이 되어주려 하지만 갓 만난 자신과 같은 고향사람 중 누구를 믿을지는 너무 선명했다. 역시 어린 인어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이 정답이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억울해서 표정을 풀 수 없었다. 그런 딕의 표정을 읽엇는지 뒤늦게 온 알프레드가 딕의 어깨에 담요를 덮어주며 말했다.
"걱정마십시오, 리처드 도련님."
주인님께서는 꽉막힌 벽창호 같은 분이시지만, 그래도 진실을 추구하시는 분이시랍니다. 그러니 힌 쪽의 말만 듣고 속단하지 않으실겁니다. 만약 도련님의 의견을 묵살하려고 하면 제가 따끔히 혼내드리겠습니다. …정말요? 물론이지요. 단, 도련님께서도 말없이 나가신 걸 따끔히 혼내드릴겁니다. …오, 그냥 살살해줘요. 딕은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그말을 믿지는 않았다. 브루스의 부모님은 인어에게 당했으니 딕보다는 그 사람에게 감정이입을 하기 쉬웠고, 딕은 아직 어린 아이게 불과했으니까. 그러니까, 이런건 절대 기대하지 않았다.
"그럼 이제 네 이야기를 해보겠니?"
사내를 적당히 달래어 치하하고 보낸 브루스는 딕을 방으로 데려와 앉힌 후 말했다. 혼내는게 아닌가? 고개를 들어 브루스의 얼굴을 살펴보면 잔잔한 얼굴은 화내는 것과는 거리가 있어보였다. 화내지 않으시나요? 화는 낼거야, 네가 말없이 밖으로 나간 것에선 말이지. 하지만 아까 전의 그분과의 일은 잘 모르니 섣불리 말할 수 없겠구나. 한쪽만 들어선 알 수 없으니 네 입으로도 어떻게 된건지 이야기 해줄 수 있겠니? 물론, 네가 날 믿는다면 말이야.
"…알프레드의 말대로네요."
"알프레드가 뭐라고 말했니?"
"꽉막힌 벽창호같은 사람이지만,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요."
…알프레드. 딕의 대답을 들은 브루스가 알프레드에게 눈길을 주었으나 알프레드는 당당했다. 틀린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딕? 나는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니고 그저… 범죄가, 슬픈 일이 더이상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탐정일 뿐이란다. 그게 그게 아니예요? 추구하는 바는 같지만, 온전히 그럴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이제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드니?
"…그 앤, 그 인어는 아무 잘못이 없었어요."
알프레드랑 브루스가 나가고, 아직도 잘 실감이 가지 않아서 밖으로 나왔어요. 그 애를 보면 뭔가 풀릴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무작정 해변을 갔죠. 그래서 그 앨 부르려했더니 이름도 뭣도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주저앉았더니 그에가 먼저 날 찾아와 주었어요. 그애를 보니까 엄마아빠랑 헤어지던 때가 선명하게 기억이나서…그 앤 날 달래주려 했던 거예요. 제가 엄마를 보고 싶다고 했었거든요. 그래서 그 앤, 자기가 들었던 엄마의 노래를 불러준 것 밖에 없어요.
"하지만 딕, 인어의 노래는…"
"알아요, 사람을 홀리죠."
하지만 맹세코 그 아인 그럴 의도로 한게 아니예요, 그게 아니라면 홀린 내가 바다로 빠지려 했을 때 노래를 멈추고 안간 힘을 써 막지 않았겠죠. 내가 정신을 차리고 제자리로 돌아올때까지 아이는 버텼어요. 내가 바다에 올라가고 놀랐을 그 애에게 괜찮냐고 물으려 했을 때 돌이 그 애에게 날아왔어요. 그 사람이 술에 취했는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오고 있는 거예요. 그거 뿐만 아니라 몇번 더 맞추려고 돌을 더 던지기 까지했어요. 그 앤 맞고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래서 내가 하지말라고 하니까, 그 사람은 날 인어 앞잡이라면서 나도 혼내주겠다고 했어요 바다 속의 인어보다는 땅 위의 내가 더 만만했겠죠. 그 앤 내가 위험에 처한걸 그냥 둘 수 없었는지 물을 뿌렸고 그 뒤에 브루스가 온거에요.
"그랬구나."
그런데 네 말을 들어보니 인어와 너는 이미 안면이 있는 듯하구나. 그 이야기도 해줄 수 있겠니? 어… 미리 말 못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브루스의 부모님도 인어에게 당했다고 그러니까 더 말하기 껄끄러워져서. 괜찮으니 말해보렴, 모든 인어가 같지 않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단다. 그 앤… 우리 가족의 은인이에요. 인어, 그러니까 세이렌? 들이 우리를 노리려고 할 때 혼자서 우리를 배에서 탈출시켜주었어요.
"인어가 먼저 사람을 위해 나서다니 드문 경우구나. 혼자서 그 많은 사람을 구할 수도 없었으니 너희 가족을 구하는 것만으로 최선이었겠지."
"처음 그앤 배의 모두를 구하려 했다고 생각해요."
"…자세히 알려줄 수 있겠니?"
그애를 처음 만난건, 배 위에서 였어요. 인어 바위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배를 구경하고 있었죠. 궁금한게 많은 아이였나봐요. 전 엄마품에 있었고 높은 곳에서 있어서 떨어진 곳의 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고 그 애에게 인사했죠, 엄마아빠에게도 부탁해서 인사를 하게 했어요. 그때 그 아인 숨어버렸지만. 조금 이따가 그 애가 선미에서 모습을 들어냈어요, 모터가 내는 물살에 저항해서 배의 방향을 건들이려했던거 같아요. 몸은 어딘가 부딪힌 것처럼 여기저기 붉었었고요. 어딘가 부딪혀 항로를 틀려했던 걸지도 몰라요, 그게 안돼서 뒤를 노렸던 거겠죠.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위험하다 싶어서 소리쳤고 아이는 물살에 휩쓸려 갔어요. 내 이야기를 들은 엄마랑 아빠는 저를 그저 끌어안기만 했구요. 그애의 노력이 있었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고 항로대로 이동해 선실 안에서 노랫소리가 들렸죠. 쿵 소리와 함께 물이차기 시작했고.
그 앤 또 우릴 구하기 위해 배 안으로 들어온거예요. 엄마아빠가 겁을 내자 처음으로 소리를 내었죠, 그건 좀 특이한 느낌의 목소리였어요. 엄마아빠를 이끌고 배에서 떨어진 곳으로 우릴 이끌었죠. 날 이곳에 여기로 이끈 것도, 브루스와 알프레드를 제가 있는 곳까지 부른 것도 다 그 애일거에요. …엄마아빠가 부탁했거든요. 난 싫다고 엄마에게 달라붙었었는데, 잠이 든건지 정신을 잃은건 지 깨어나니 여기였어요.
"그래, 그랬구나. 네 말대로면 앞 뒤가 맞아, 홀린듯 바다로 간 것이나 바다에서 정신을 차린것이나."
애초에 해변으로 불러들이는게 목적이었으니 바다에 나오면 더 부를 필요가 없겠지. 자신과 있으면 더 안좋은 일을 당할까 우리가 오기전에 모습을 숨긴거고. 브루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알프레드가 한가지 말을 얹었다. 리처드 도련님께서 바다에 오시고 바로 모습을 드러냈다면 아마 무리에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 머물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사람을 불러들였지만 믿을 수 있는지없는지는 별개의 문제니까요. 허허… 저희는 리처드 도련님은 물론 인어에게도 신뢰를 받지 못한 것이로군요.
"난 그 애가 너무 걱정되요. 아까 돌에 맞고 피를 흘리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치료해주러 가시겠습니까?"
정말요? 물고 소독제, 방수밴드를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다만 아까전과 같이 노래를 불러달란 부탁은 하시 마십시오. 이 늙은이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에이, 안해요. 목소리나 노랫소리는 또 듣고 싶긴하지만-… 그건 그 애에게도 상처가 되는 일이잖아요. 난 해변에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주마. 내 아들의 은인이 지낼 곳은 있어야겠지.
"그럴 수 있어요?"
"근방의 해변은 전부 내 소유란다."
딕은 다시 해변으로 향했다. 아까전과 달리 제대로 복식을 차려입은 딕은 한 손에는 치료키트를 한 손에는 담요를 쥐고 나갔다. 아까전과 달리 조금 단이 낮은 곳을 찾아 내려온 딕이 바다를 향해 말을 걸었다.
"아직 있니? 아까는 놀라게 해서 미안해, 더 그러지 않을테니 내게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네가 다친 상처가 너무 걱정돼."
아무도 없는 해변에서 바다에 대고 말하는 것이 좀 쑥쓰럽긴 했지만 어디 있을 줄 모르는 아이를 위해선 꾸준히 소리를 내어야 했기에 딕은 다음에 할 말을 골랐다. 무슨 말을 할까, 노래에 대한 감상을 말할까, 구해준 것에 대한 감사를 말할까. 그런 사이 발 끝으로 바닷물이 튀었다. 놀라 아래를 보면 어느새 어린 인어가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피는 멎었는지 흘려내리지는 않았지만 자국이 눈꺼풀을 살짝 덮는 바람에 한쪽 눈을 감고 있었다. …아프겠다. 다시한번 상처를 눈에 담은 딕이 말했다.
"이리와, 널 치료하려고 키트까지 챙겨왔어."
딕은 손에 쥔 키트를 내 보이며 말했지만 인어는 그냥 그곳에 머물렀다. 아까전의 그 아저씨 때문에 그래? 괜찮아, 이제 안올거야. 다른 사람도 더 오지 않을거야. 브루스가 막아준다고 했거든. 브루스가 누구냐면 말이야, 네가 불러준 사람 중 젊은 사람이야. 그 사람은 엄청난 부자라서 이 해변도 자기거라지 뭐야. 그러니까 이제 브루스의 허락 없이 해변에 오는 사람은 없을거야. 그리고 이 키트는 알프레드가 챙겨준거! 알프레드는 누구게? 네가 연결해준 또다른 한분이야.
"이제 안심되지않아?"
네 덕분에 난 살 수 있었어, 브루스도 알프레드도 널 미워하지 않아. 내가 말했거든 니가 날 구해준거라고. 그때도 아까전에도. 그러니까 응? 이리와…. 딕의 설득에 그제서야 인어가 딕의 곁으로 다가왔다. 가까이 온 인어를 치료하기 위해 키트를 연 딕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좀 낮은 곳을 데려왔어도 여전히 높이 차이에 치료가 용이하지 않다는 것이다. 알프레드에게 부탁한다면 그가 능히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성인남자에게 맞은 인어가 모습을 드러낼지도 의문이거니와 그냥 제 손으로 하고 싶었다.
"있잖아, 네가 바위 위로 올라와야 할 것 같은데 혼자서 할 수 있겠어? 내가 잡아줄까?"
딕의 제안에 인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양팔을 짚어 오르려 했지만 여전히 높아선가 쉽게 올라오지 못했고 딕이 인어의 곁에 와 잡아주어야 겨우 올라온 인어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와-. 이제야 제대로 인어의 모습을 제대로 보게된 딕은 탄성을 흘렸다. 흑단같은 머리도, 바다와 닮은 눈동자도, 그리고 장미같이 붉은 꼬리도 모두 하나의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탄성을 흘린채 가만히 바라보는 딕이 의아했던지 인어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딕에게 고개를 가까이 내밀면 딕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더 가까이 가면 얼굴이 터질지도 몰라.
딕은 애써 치료 준비를 하는 척 키트를 뒤적였다. 오늘 참, 덥다 그치? 되도 않는 변명이다. 그러나 인어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걸 좋아해야할까? 알프레드가 챙겨준 물병을 따며 말했다. 일단 물로 씻어내고 소독을 할거야. 소독할 때 좀 따가울 수도 있는데 나쁜건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마. 그리고 약을 바르고 마무리는 반창고! 상처부위는 건들면 덧나니까 너무 건들지는 말고.
물을 부어 상처부위를 씻고 핏자국을 닦아내었다.소독약을 바를 때는 정말로 따가웠는지 움찔거리며 딕을 잡았으나 그 이상 무언가 하진 않았다. 약을 바르고 방수밴드까지 덮어주고 한숨을 내쉬었다. 당당히 치료하겠다 했으나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정도면 어떡하지 하고 겁냈던게 무색하게 그리 큰 상처는 아니었다. 그래도 저 모습에 상처난게 서글펐다. 흉지면 안돼는데.
"있잖아,"
나랑 같이 안갈래? 딕의 질문에 인어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쳐다보았다. 브루스가 날 입양해준다고 했어. 넌 내 은인이니까 부탁하면 너도 함께 지낼 수 있을거야. 해변을 소유할 부자니까 네가 있을 만한 곳도 만들어 줄 수 있을거야. 안…돼? 딕은 처음으로 미인계를 써보았다. 서커스단원들이나 부모님에겐 잘 통하는 것이었는데 과연 이 어린 인어에게 통할지는 말 모르겠다.
아니나 다를까 제 슬수를 알아챈 인어가 콧방귀를 뀌고는 바다 속으로 뛰어 뜰어갔다. 어, 잠깐-…! 커다란 파운을 일으킨 바람에 쫄닥 젖은 딕이 손으로 내려온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직 이름도 못 물어봤는데… 너무 조급했나. 저기, 있어? 딕이 다시 인어를 불러 보았으나 다시 올라오는 일은 없었다. …아, 차여버렸다.
퍽. 처음으로 돌에 맞았을 땐 별이 보이는 줄 알았다. 통증에 손을 얹고 보니 손에 피가 묻어났다. 야단났네. 바다에서 출혈은 꽤나 안좋은 신호였다. 다행히 여기가 육지와 가까워 그들이 나타나진 않겠지만. 이 순간 바로 느껴지는 것은 바다의 위협이었다. 그 뒤로 몇번이고 돌이 날아왔지만 처음 맞은게 우연인지 날아오는 족족 제이슨에게 닿지 못했다.
"뭐하는 짓이예요!?"
사람이 인어를 싫어하는 일은 익숙한 일이건만, 아이가 화가난 듯 인간의 남자에게 소리쳤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제이슨은 아이를 말리고자 손을 뻗으려 했다. 아이가 하지않아도 목소리 한번 내는 것으로 그는 아무말도 못하게 될 것이니까. 그런데,
"누가 구해달라고 했어요? 왜 아무 잘못도 없는 애를 쳐요?!"
아이의 말에 제이슨의 움직임이 딱 멈추었다. 언젠가 배 위에 날아오는 것들에 맞았을 때, 사람들이 저를 무서워 할때, 욕할 때. 수 없이 들었던 생각이 아이의 입을 통해 튀어나왔다. 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그러나 그 목소리를 누구에게 닿게 할 수도 없어서, 자신의 형제자매들이 벌인 것을 외면할 수 없어서 그대로 받아들였던 부당함이. 아이의 입에서 튀어니왔다. 본인도 형제자매들의 피해자면서도 자신을 감싸려 들고 있었다. 그냥,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지금 눈을 질끈 감아버리면 고여있던 물이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 때, 네가 손을 흔들어주던 그때 손이라도 흔들어주는 건데. 그렇게 했으면 곁에 머물다 너를 이곳에 데려오지도, 이런 기분이 들 필요도 없었을 텐데.
"아, 알겠다. 네 녀석 인어들의 앞잡이구나! 그런게 틀림없어! 너도 같이 혼내주마!"
인간남자가 휘청휘청이며 아이에게 다가오기에 급하게 꼬리를 이용해 물보라를 일으켰다. 가까워진 탓에 흠뻑 젖은 남자는 부라리는 눈을 제이슨에게로 돌렸다. 다시 돌을 맞는 것은 싫지만 아이에게 해가 가는 건 더 싫었다. 오냐, 인어새끼 니가 네 명을 채촉하는구나! 그리 소리치며 팔을 걷어붙이려 할때 남성의 뒤로 누군가 아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딕!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려보면 그 때 해변으로 불러들였던 사람중에 한명이었다. 다행이 좋은 사람이었는지, 아이를 데리러 온 모양이었다. 다행이야. 제이슨은 그가 제이슨을 눈치채지 전에 바닷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피는 조금 흐르지만 인어의 회복력이라면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이 상처만 회복되면 바다로-… 떠날 수 있을까? 제이슨은 다시 저를 두둔하던 아이를 떠올렸다. 떠나면 더 못볼텐데… 조금만 조금만 더 머물자.
아이는 조금 후에 다시 바다로 찾아왔다. 그런 일이 있어 더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이는 저를 치료하겠답시고 다시 찾아왔다. 치료하게 오라는 아이의 말을 듣기엔 영 겁이났다.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 아이를 또 꾀어버리면 어떻게 하지? 인어의 노래가 사람을 홀리는 것도, 목소리 자체에도 그런 힘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아이 앞에서 노래를 불러주었고 아이를 죽일 뻔했다. 부르지 않으면 소리내지 않으면 되는 간단한 문제였지만. 아이가 부탁했을 때 거절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런 일을 겪고도 아이는 제게 다가왔다. 오히려 저를 보살핀 이이게 자신을 구해준 착한 인어라 소개시켜줬다고, 하지만 내가 과연 그럴 자격이 있을까? 아무리 부모의 부탁이라 하나 제이슨은 아이만을 선택했다. 사실 부모가 저들을 구해달라하였더라도 상황에 따라 아이만 구했을지도 모르지. 제이슨이 구하고자 한건 아이였으니까, 그러니까 제이슨은 아이를 선택함으로 아이의 부모를 죽인 것이나 다름 없었다.
치료를 받으면서도 내내 그런 생각 뿐이었다.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는 걸까. 그리고 그 고민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 그런 말을 하는 아이에, 조금 기대하는 얼굴을 보이는 아이의 얼굴에 그래선 안된다고 깨달았다. 나는 이런 호의를 받은 만한 인어가 아니야, 떠나야만해 떠나야만, 떠나야만….
"딕은 그 인어를 상당히 좋아하는구나."
"응, 뭐… 첫사랑이니까."
브루스가 소개시켜준 새 친구는 이해심이 깊은 친구였다. 브루스만큼은 아니지만 부호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팀은 꽤나 포용력이 큰 사람이었다. 모든 인어가 나쁜게 아니라는 브루스와 딕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팀에게 딕은 호감을 느꼈다. 그래도 자신의 작은 인어에 대해 말하는 것은 조심스러워 한동안 그를 살피고나서야 겨우 사실을 털어놓았다.
사실은 그런게 아닐까하고 생각했어. 딕은-… 인어를 두둔하는 게 마치 경험한 사람 같이 굴었거든. 내가 듣기론 인어의 바위에서 당했는데 운좋게 여기로 흘러 들어온거라고 들었는데. 그러기엔 네가 인어를 너무 좋게만 보고 있어서. 어디까지나 추측에 지나지 않아서 입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딕의 영리한 친구는 딕이 인어에 가진 감정이 단순이 은인을 생각하거나, 친구 이상이라는 것을 여럽지 않게 추측해냈고, 딕도 팀에게만은 스스럼 없이 털어내었다.
말은 해봤어? 아니, 그러다 도망칠것 같아서. 브루스에게 듣기론 인어는 무리 생활을 중요시해서 한번 무리로 이탈한 인어를 무리로 받아주지 않는대. 거기다 제이슨은 우릴 구해주느라 나를 구하기 위해 무리의 의지에 반하기도 했으니까 돌아갈 수 없을거래. 그런 애가 여기까지 떠나면 갈 데가 어디있어. 나는 내 욕심으로 그 애가 있을 곳을 빼앗고 싶지 않아. 왜 있는 곳을 빼앗는다고 생각해?
"그 앤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닐테니까."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내가 비슷한 말을 했을 때 거절했어,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콧방귀를 끼고 가버리더라. …뭐라고 말했는데? 나랑 같이 가자고. 브루스가 날 입양아로 받아준다니 너도 받아줄거라고. 말을 바꿔보는건 어때? 뭐라고? 나와 함께 떠나지 않겠냐고. 뭐가 다른데? 장소와 시간. 딕이 말한거 만난지 얼마되지 않아서였지? 너야 첫눈에 반했을지 모르지만 그 앤 다를 수도 있잖아, 네가 무사한 걸 알면서도 떠나지 않았다며 가능성 있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그건 달리 갈 데가 없어서…"
"바다에서 누구보다 자유로운 인어가, 정말 무리에서 쫓겨나서 여기에만 머문다고 생각해?"
그래 어렸을 때라면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너도 그 인어도 성장했잖아. 월등하게 강해지진 않았겠지만 어느정도 자기 방어는 할 수 있을 테니 바다에 나가도 문제 없을 거고 너도 무사히 성인이 되었으니 더 지켜볼 이유도 없지. 그럼에도 네 곁에 있다면 난 가능성이 있다고 봐. 이봐, 딕. 대체 뭘 두려워하는 거야? 널 잡아먹을 뻔한 바다도 무섭지 않다며, 무엇이 네 용기를 그렇게 움츠리게 만드는 거야? 티미, 난 겁이 많은게 아냐. 욕심이 많은 거지. 내 작은 인어에게 거절을 듣고 싶지 않은 거야. 고백하지 않으면 거절도 없는 거잖아. 뭐가 다른데?
"…그래, 네가 정 그렇다면 내게도 생각이 있어."
뭘 하려고? 네 인어를 만날거야. 이참에 이름도 알아야겠어. 네가 둘둘 감추는 바람에 안지 몇년째인데 이름도 몰라? 브루스씨에게 허락 받아 들어갈거야. 안돼! 내가 허락 못해. 오, 딕. 그 해변은 네가 아니라 브루스씨의 해변이야. 네가 그의 모든 것을 이어받지 않는 한 네 허락은 중요하지 않아. 티미, 제발! 차라리 나와 가! 괜찮겠어? 차라리 내 시야에서 이루어지는게 차라리 나아.
결국 제이슨은 딕을 떠나지 못했다. 얼마나 나약한 각오인지 딕을 다시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차마 떠날 수가 없었다. 그의 철천지 원수나 다름 없으면서 그를 사랑하는 꼴이라니 우습기 그지 없었다. 최소한의 속죄로 곁에 있는 것 외에 욕심을 내지 않기로 다짐했는데 그것도 영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가 데려온 새로운 친구를 보고 기분이 좋지 않은 거 보면.
"인사해 제이슨, 내 친구 팀이야."
"안녕 제이슨, 네 이야기 많이 들었어."
이름을 알려주고부터는 항상 '제이'라고 불러왔던 주제에 이번에는 '제이슨'이다 제 친구 앞에서 인어와 친한척 하고 싶지 않다는 건가? 자꾸 이런 못난 생각만 들었다. 깊은 숨을 내쉬어 생각을 털어낸 후 손을 흔들었다. 그 처럼 인사하면 좋겠지만 제이슨이 말을 잘못 꺼내면 둘 다 바다로 빠질 수도 있으므로 주의해야했다. 제이슨은 더이상 딕에게서 어떤 것도 빼앗고 싶지 않았다.
"말은, 하지 않네?"
"인어는 목소리만으로 홀리게 하는 모양이라. 가볍긴 하지만 중첩되면 아무래도 좋지 않으니까."
"그렇구나, 그래도 불편하겠다. 어떤 알고리즘인지 알수만 있다면 해결 방법을 찾을 지도 모르는데."
팀의 중얼거림에 제이슨이 솔깃했다. 솔직히 말을 할 수 없는 건 매우 답답한 일이었으니까. 특히나 딕처럼 모르는 척 하는 경우가 많은 이를 상대할때는 더욱. 어릴 때야 바다로 숨어버리면 끝이지만, 지금에선 그것도 성숙한 방법이 아니라 하기에 꺼려졌던 터라 팀의 말은 꽤 반가웠다. 아하, 제이슨도 많이 불편했구나. 멀찍히 있던 제이슨이 팀에게로 가까이 가니 그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도 생각을 못한건 아닌데 제이슨은 내 앞에서는 절대로 입을 떼지 않으니까. 변명을 하듯 딕이 말을 덧붙였다.
녹음기 같은걸로 녹음해달라고 하는건? 아무래도 기계니까 바닷물에 젖으면 고장나니까. 마침 녹음기랑 방수팩이 있는데 한번 시도해볼까? …팀. 그런걸 왜 가지고 있는 거야. 유비무환이라는게 있으니까. 팀이 준비해온 녹음기를 방수팩에 넣고 잠궜다. 잘봐, 이 버튼을 누르면 녹음이 되고 한번더 누르면 멈추는 거야. 여기선 우리가 걸릴 수도 있으니 바닷속에서 해봐줄래? 팀의 요청에 제이슨이 바다에 들어갔다 나왔다. 녹음기를 돌려받은 즉시 소리를 들어본 팀이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아무렇지도 않은데? 제이슨 우리가 잠깐 홀렸어? 혹시나 싶어 영향을 받지 않는 제이슨에게 물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제이슨이 보기에도 아무렇지 않았다. 매질 문제려나, 그럼 우리가 저기 떨어져 있을테니 한번 목소리를 녹음해줄래?
팀의 요청에 제이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적당히 떨어진 것을 보고 소리를 내었다. 바보 멍청이. 그렇게 중얼거린 제이슨이 녹음을 끄고 돌아온 두 사람에게 돌려주았다. 소리를 들은 두 사람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지만 홀린 것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건 두가지야, 매질과 매체. 홀리는 건 인간 뿐이니까, 바다속에서도 사람이 반응할까? 탐구 모드에 들어간 팀은 당장이라도 바다로 들어갈 기세라 그것을 막고자 손을 들었다.
제이슨은 본 적이 있어? 어때 홀렸어? 제이슨은 차례로 고개를 끄덕이고 저었다. 물에 빠진 사람은 더이상 홀려있지 않고 도망가기 바쁜 것을 보았다. 흐음. 그럼 매질도 포함이네. 정확히 무엇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기계를 통해 듣는 목소리나, 매질을 달리한 소리에는 반응하지 않는 모양이야. 당장에 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이어셋을 준비하는거네, 그걸 통하면 제이슨의 목소리를 바로 들어도 괜찮을거야. 매질의 문제는 조금 더 고민해봐야겠다.
팀이 제이슨의 고민 하나를 해결할 실마리를 준 것만으로 제이슨 안의 평가가 바뀌었다. 팀은 좋은 사람이었다. 딕의 친구니 어련히 그럴 줄 알았지만 그의 고민을 턱 해결해주는 면을 보면 새삼 달라보였다. 눈을 빛내는 제이슨을 본 딕이 조금 불만스러워 보였다. 나한테는 그렇게 빛내주지 않았으면서…. 제대로 듣지 못한 제이슨이 딕에게 고개를 돌리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것도 아니야, 알피가 셋이서 먹으라고 쿠키를 구해왔는데 깜박했다. 마실것도 가져올건데 뭐가 좋아?"
"나는 커피,"
제이는 쥬스? 아, 물? 그래 알았어. 딕이 자리를 떠나자 연구로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소강되었다. 그 사이로 팀이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려와 제이슨이 고개를 돌렸다. 왜 웃는거야?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전해질 의도라 팀이 스스럼 없이 대답했다. 딕이 아무래도 나에게 네 애칭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야. 계속 제이슨이라고 부르더니, 마지막에 저도 모르게 흘렸네. 애칭? 그러고보니 마실것을 물을 때 확실히 '제이'라고 불렀던 것 같기도 했다. 그럼, 팀에게 친하게 보이는 게 싫어서가 아니라, 애칭을 숨긴거였단 말야? 제이슨은 제 오해에 괜히 얼굴이 달아오르는 듯 했다.
"…사실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널 보자고 했어."
제이슨이 조용히 제 얼굴을 식히고 있을 때 팀이 가만히 운을 띄웠다. 제이슨은 딕을 좋아해? 돌직구로 묻는 통해 제이슨이 흠짓 놀라고 말았다. 좋아하는 구나. 그런데 왜 그를 받아주지 않아? 팀의 말에 제이슨은 입을 달싹이다 손을 내밀었다. 의아해하던 팀은 곧 그 손이 무엇을 의미하는 줄 이해하고 방수팩에 든 녹음기를 내밀었다. 받은 제이슨이 바다로 내려갔다 다시 나와 내밀었고, 팀은 그것을 받아 재생했다.
[나는 그럴 자격이 없어. 나는 그 애의 부모님을 죽인거나 마찬가지야.]
"그건 부모님을 죽인게 아니라 딕을 살린거지. 부모님도 딕을 부탁한거잖아?"
"……."
"부탁이 아니어도 딕을 살릴 생각이었구나,"
팀의 말에 제이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그건 부모님을 죽인게 아니라 딕을 살린것이라고 생각해. 네가 어떤 마음을 했든 너는 딕을 살린거라고 생각해, 생판모르는 남보다는 호감이 있는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게 일반적이니까-…혹시 너도 처음부터인거야? 대답하던 팀이 제이슨을 돌아봤다. 너도? 묘한 단어 선택에 제이슨이 고개를 기울이면 팀이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이건 무슨, 천생연분도 아니고.
"…여기 머물고 있는거는? 딕 때문이 맞아?"
팀의 질문에 바다를 쳐다보던 제이슨이 다시 손을 내밀어 녹음기를 받아갔다. 머뭇거리며 바다로 들어간 제이슨은 아까보단 조금 늦게 올라와 내밀었다. 할 말이 많았던 걸까? 팀이 녹음기를 재생하면 제이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떠나야한다는 건 알고 있는데, 딕이랑 다시 못본다고 생각하니 떠날 수가 없었어. 역시 네가 여기 있는 건 온전히 딕 때문이었구나. 그렇다면 딕이 너에게 떠나자고 하면 같이 갈거야? 팀의 질문에 제이슨이 저를 가르켰고 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안고있는 그 문제, 딕이 괜찮다고 한다면 말이야. 그래도 자기랑 같이 있어달라고 한다면. 만약의 상황을 가정하여 팀이 물었다. 딕이 괜찮다고 한다면? 딕은 상냥하니 괜찮노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의 상냥함에 기댈 뿐이지만, 그렇지만 그래도 된다고 한다면…. 제이슨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대답이 듣고 싶었어."
남은건 목소리 문제 뿐이구나, 그건 차차준비하면 되고… 그럼 제이슨. 미리 충고 하건대 마음의 준비는 해두는게 좋을거야.
딕은 바다로 내려갔다, 별이 빛나는 밤길이라 뻗는 발걸음이 퍽 조심스럽지만 속도가 느려지진 않았다. 성큼성큼 돌무더기로 이루어진 해변을 건너 끝에 도달하면 바위 위에 앉아 바다의 저편을 바라보는 자신의 인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제이! 반가움에 그를 부르면 고개가 천천히 움직여 저를 바라봤다. 저를 눈에 담은 제이슨은 달빛에 빛나 한층 더 아름다웠다. 그의 목에는 검은 색 초커가 달려 있었는데 제이슨의 목소리를 녹음해간 팀이 기어코 장치를 만든것이다.
"이 시간엔 어쩐일이야?"
"파티가 길어져서, 몰래 빠져나왔어."
팀에게 들었지? 브루스에게 친아들이 있다지 뭐야. 누가봐도 똑 닮았던데 한참을 고민하던 브루스가 오늘에야 그를 받아들였거든. 그를 환영하기 위한 파티였어. 서운하진 않아? 그럴리가. 내게도 동생이 생기는 건데, 전혀! 그리고 그 아이가 들어와서 겨우 마음을 정할 수 있었고. 딕의 의미심장한 말에 제이슨이 고개를 게슴츠레하게 떴다. 딱 무엇을 꾸미는 지 알아보기 위한 얼굴이었다.
"나, 바다로 떠날거야."
"…그래?"
"그래서 말인데, 나와 함께 가지 않을래?"
딕의 말에 제이슨이 눈을 끔벅였다. …팀에게 들었어, 내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그걸로도 좋아. 죄책감에 비롯한 감정이라도 좋아. 제이슨, 난 네가 좋아. 너의 모습을 처음으로 모두 담았을 때부터, 네가 날 안고 헤엄쳐 갔을 때부터, 네가… 바위 섬 뒤에서 날 보던 그때부터. 네가, 나와 함께 해주었으면 해.
"…나는, 난, 널 떠나야만 한다고 생각했어."
넌 내가 얼마나 끈질긴지 모를거야. 네게 인사 한 번 받았다고 좋아선, 네 곁에 머물고, 네가 내 편 한번 들어줬다고 여길 떠나지도 못했지. 말로만 떠나야지 떠나야지 하면서 말이야. 그러니까, 내 말은-…넌 내게 같이 가자고 그런 걸 후회할거야. 난 이제 너한테 안 떨어질거거든. …그게 내가 원하는 바야, 내 작은 인어. 그 '작은'은 치울수 없어? 네 크기를 넘은지가 언젠데. 싫은데, 넌 언제까지나 내 작은 인어야, 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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