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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

[팀슨]

쿠오니 2018. 1. 20. 14:06

소재주의,. 약간의 미화가 있을지도.

 

 

1

제이슨 토드에게는 누구도 알지 못하고 누구도 알게 하고 싶지 않은 비밀이 한가지 있다. 인정하진 않았으나 손아래 동생인 팀 드레이크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으며 그 사랑의 표현으로 제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그것이 정기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오직 당사자 외에는 모르고 있었다. 약간의 폭력과 협박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고담의 자경단이 폭력성이 없을 수는 없겠으나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희열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었다. 다른 배트맨 일가와는 달리 불사를 버린 제이슨이라 할지라도 그러했으니 다른 자경단원은 말할 것도 없을 터, 단 한 사람 팀 드레이크를 제외하고서.

물론 제이슨 역시 처음부터 그의 폭력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합당한 폭력에도 참아내지 않을 제이슨이, 팀이 휘두르는 부당한 폭력을 묵묵히 감내할 리가. 제이슨은 있는 힘껏 저항했었으나 영악한 팀에 의해 이미 한차례 소동을 일으킨 뒤라 힘이 빠져있는 제이슨은 결국 팀에게 덜미를 잡혔다. 그런 제이슨을 도망치지도 못하게 잡아둔 다음 힘을 실어 주먹을 내질렀다. 처음 몇 방 정도야 맞고서도 버틸 수 있었으나 쉼 없이 들어오는 공격에 제이슨의 단단한 맷집도 버티질 못했다. 쿨럭쿨럭! 바닥에 엎드려 기침을 토해냈다. 얼마나 세게 친 건지 토해낸 침 사이로 피가 섞여 나왔다.

"많이 아파?"

몇 차례 더 기침을 내뱉으니 팀이 다가와 물었다. 팀에게 맞으면서 몇 번이나 바닥을 굴러 지저분한 제이슨과 달리 팀은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 그대로였다. 아무리 일방적이라고 하지만, 피 한 방울 묻지 않는 것이 얼마나 철저한지. 제이슨은 허, 하고 헛웃음을 삼켰다가 덮쳐오는 흉부 통증에 다시 한번 기침을 토해냈다. 쿨럭, 많이 아프냐고?

"인정사정없이 주먹을 휘둘렀던 게 누군데, 그따위 헛소리를 하냐.“

 

헛소리라니, 네가 걱정되니까 물은 거잖아. 그리고 무기를 휘두르지 않았으니, 봐주지 않은 것도 아니잖아? 팀의 말에 제이슨이 왈칵 인상을 찡그렸다. 그걸 말이라고, 그런 걸 휘두르면 날 더러 죽으라는 거지. 설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길 바랐겠어? 설령 그걸 네게 휘두르더라도 너를 죽일 생각은 조금도 없어 그 직전까지는 몰아버릴 순 있겠지만.

"파스나, 진통제 있는 데 좀 줘?"

"얼씨구, 지금 병 주고 약 주냐?"

게다가 둘 다 통증만 완화 시키는 종류고, 보통은 연고를 주지 않냐. 내가 뭐하러 그런 걸 주겠어. 이렇게 공들여서 만든 상처를 금방 사라지게 하는 약 따위를. 그리고 상처가 나아버리면 다시 만들 거니까, 나아도 별 소용 없잖아? 아니면 벌써 내 손길이 그리운 걸까? 그럴 리가.

"그래서 필요 없어? 모처럼 챙겨왔는데."

"그럼 진통제."

제이슨은 통증에 말을 듣지 않는 제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대답했다. 겨우 바닥을 딛고 일어섰으나 바닥을 딛고 있는 다리가 후들거렸고 고개를 영 가누기가 힘들었으며 고개를 획 하고 젖혀버리면 어지러움에 금방이라도 다시 쓰러질 것 같았다.

"파스는?"

진통제 몇 알을 제이슨에게 건네면서 팀이 물었고 제이슨이 대답했다. 찢어진 데도 있는데 내가 미쳤다고 그걸 쓰겠냐. 괜찮겠어? 진통제만으로는 힘들 건데. 팀의 말에 제이슨이 픽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더 효과가 좋은 걸 주던가, 왜 너희가 거둬간 것도 꽤 많지 않냐? 가져오면 쓰긴 하고? 미쳤냐, 그런 걸 쓰게. 단순히 농담이었건만 가져오기라고 할 태도에 제이슨이 정색했고, 팀은 약간 느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아쉽네, 약에 취한 당신을 볼 좋은 기회였는데. 입맛을 다시는 팀을 보며 제이슨은 솔직하게 감상을 뱉었다.

"미쳤네."

"그럴 리가, 제이슨. 난 지극히 이성적이야?"

"그럼 이성적으로 미쳤든가."

명색이 자경단이라는 놈이 마약을 가져오려 하는 것부터가 미친 게 분명한데, 본인이 제정신이라고 하니 제정신으로 미쳤다고 할 수밖에. 제이슨은 팀에게 받은 알약을 입안에 털어 넣고 아득아득 씹었다. 쓴맛이 입안에 고인 핏물과 섞여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으나 기어코 그것을 삼켜냈고, 그 모습을 본 팀이 말했다. , 있었는데. 필요 없어. 제이슨은 팀이 쥐고 있는 페트병에 잠시 눈길을 주다 거두며 대답했다.

"제이슨."

약도 받았겠다, 슬슬 자리를 뜨려던 제이슨을 팀이 불러세웠다. 아직도 용건이 남아 있던가. 제이슨은 멈춰서 팀을 향해 돌아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꿈틀거리는 그의 눈썹이 불쾌감을 드러냈다. 내가 일부러 약도 챙겨왔는데, 아무것도 없는 거야? 팀의 요구에 제이슨은 기가 찼다. 애당초 팀이 아니었다면 팀에게 진통제를 받을 일도 없을 것인데도 진통제를 챙겨온 것으로 보상을 받으려 하다니. 하지만 저 이성적으로 미친놈에게는 정당한 요구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고 제이슨은 팀과 입씨름 할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받고 싶으면 네가 오던지."

보다시피 누구씨 때문에 거동이 불편해서 말이야. 제이슨의 대답에 팀의 눈이 곱게 휘어졌고, 제이슨은 소름이 돋았다. 겨우 이 정도에 속이 뒤틀렸나? 팀이 기분 나쁘든 말든 제 알 바는 아니었으나, 그로 인해 제게 폭력이 되돌아오는 것은 곤란했다. 요령 좋게 골절은 피했으나 솔직히 한계치였고 여기서 제대로 맞으면 일어설 수나 있을지. 뚜벅뚜벅 팀은 제이슨의 요구대로 제이슨에게 다가가, 지척까지 가까워지자 손을 뻗어 제이슨의 턱을 쥐고 제게로 틀었다. 그것만으로 제이슨에게는 썩 버거웠으나, 팀을 마주하고서는 씩 웃어 보였다. 약효는 아직 돌지 않았으나, 받은 진통제만큼은 서비스를 해줘야지 본인도 그것을 원하고 있고.

"피 맛이 나네."

기어코 입을 맞춘 팀이 말했다. 입안이 터졌는데 당연하지, 너 내가 피 섞인 침 뱉는 거 못 봤냐. 제이슨의 물음에 팀이 대답했다. 보기야 했지, 하지만 실제로 맛본 거랑은 다르잖아. , . 그렇습니까?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경험하는 것이 다르다고 해도 아주 다르지 않았다. 하물며 팀은 자경단을 하며 많이 맞기도 했을 거고 입안도 터진 경험이 있을진대, 핏물이 섞인 침을 보고서도 모른다니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의 원하는 바대로 서비스한 제이슨이었으나, 굳이 저를 엉망으로 만든 후에 제게 입을 맞추고자 하는 팀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제이슨이 팀의 이러한 애정표현을 이해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애정표현-이라고 팀은 제이슨에게 말했었다. 세상에 어떤 애정표현이 사랑하는 상대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설령 그러한 애정표현 방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었다. 제이슨이 보기에 그것은 단지 미친 짓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굴레를 벗어날 이렇다 할 묘안이 없었다. 용의주도한 녀석은 늘 제이슨이 힘을 빼고 난 후에야 나타났고, 아마 제이슨도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믿지 않을 정도로 이미지관리에 철저해 다른 이들에게 말해본들 믿지도 않을 것이었다. 물론 제이슨이 작정하고 증거를 들이대며 주장한다면 모르겠지만, 제이슨은 저보다 어린 동생에게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제이슨의 자존심이 팀의 비밀을 지켜낸 셈이었고, 어쩌면 팀은 그것까지도 내다보았던 것일 수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팀이 일련의 행동을 계속하는 이상, 아니 더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제이슨에게 팀은 이유 없이 제게 폭력을 행사는 미친놈으로 그 이상으로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제이슨은 팀에게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그것도 팀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

제이슨이 추측한 대로 팀은 제이슨이 저를 이해 하고 싶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이슨의 이해야 처음부터 상정해두지 않은 것이었으며 팀은 팀이 사랑하는 제이슨의 가장 예쁜 표정을 보기만 한다면 아무래도 좋았으므로 내버려 두고 있었다. 물론 팀은 제이슨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따금 차오르는 또 다른 욕구는 제이슨을 통해 받아내긴 하지만 그것이 제이슨의 마음이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애정에 반드시 애정이, 준 만큼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팀 드레이크가 제이슨 토드를 사랑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렇게 예쁜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사랑해 마지않는 그를 어떻게 가만히 보고 있겠는가. 제이슨에게 주먹을 휘두를 때, 제이슨이 받을 고통을 추측하고 또 안타깝게 여겼으나 그 손길을 거두지는 않았다. 제이슨은 고통을 느낄 때 팀이 가장 사랑하는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얼굴이 팀이 제이슨을 사랑하도록 만들었고, 팀은 원인 제공자인 제이슨에게 다시 한번, 몇 번이라도 그 얼굴을 제게 보이도록 약간의 무력을 사용하여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팀은 원래부터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스스로 로빈이 되기로 자처하였으나 단지 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행동한 것이며, 빌런들을 상대하기 위해 무력을 휘두르나 그 행위 자체에 희열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팀은 행동보다도 말이 먼저인 사람으로 행동이 먼저인 것은 오히려 제이슨 쪽이었다. 주먹을 휘두르는 것 또한 제이슨이 먼저였지 않은가. 그는 단지 로빈을 빼앗겼다는 분노에 팀을 습격해 폭행했었다, 지금도 팀은 그때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건 팀이 제이슨에게 사랑에 빠지던 순간이었으니까. 분명 맞고 있는 것은 팀 자신인데도 제가 더 아픈 표정을 짓고 있는 제이슨을, 그 예쁘고 사랑스러운 얼굴을 처음으로 본 그날을 어떻게 잊을 수야 있겠는가. 그날 이후 제이슨의 그 표정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고, 어떻게 해야 다시 그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리고 팀은 그 방법을 생각보다 빨리 찾을 수 있었다. 사랑에 빠진 것과 별개로 팀은 빚지고는 못사는 성격이었고, 팀이 당했던 그대로 제이슨에게 갚아 주었고 그 날 팀은 활로를 찾았다. 팀이 휘두른 주먹에도 제이슨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었다!

보고 싶은 사람, 보고 싶은 얼굴. 하루에도 수십 번씩 팀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그 아름다운 얼굴을 이렇게 쉽게 볼 수 있다니, 팀으로선 이 쉬운 방법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불합리? 팀과 제이슨 사이는 제이슨이 팀을 미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합리적인 명분이나 그럴듯한 핑계 같은 건 필요 없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는 것으로 충분했다. 다만 제이슨이 가만히 당해줄 위인은 아니었기에 팀은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야 했다. 그 역시 배트맨에게 훈련받은 사람이었으므로 충분히 힘을 빼서, 팀에게 저항할 수 없도록 만든 뒤에야 제이슨을 찾아갔다. 지금은 글쎄, 처음만큼 그리 철저하진 않았다. 제이슨은 이미 저항해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학습해버려서 어느 정도 힘이 빠진 상태에선 가만히 당해주었으니까. 아아, 학습이란 이리도 유용한 것이었다.

", 딕이 가족 모임을 하려 하던데. 올 거야?"

"내가 거길 왜 가는데?"

팀은 얼마 전에 딕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제이슨에게 물으니 제이슨이 왜 자신이 '가족' 모임에 가야 하는지 되물었다. 팀이 여기서 묻지 않더라도 제이슨은 결국 딕에게 가족 모임의 권유를 들을 것이었다, 딕에게 제이슨은 팀과 데미안과 마찬가지로 동생이며 가족이었으니 가족 모임에 그를 빼놓을 리 없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걸 묻는지 모르겠지만, 설사 그레이슨이 초대한다고 하더라도 갈 생각 없다. ? 온몸이 아파 뒤지겠는 데 가긴 어딜 가. 네가 준 것도 길어봐야 오늘까지만 효과가 있을 거잖아. 약이야 하나 더 먹으면 되긴 하지만, 약 하나 두 개 먹는다고 씻은 듯이 낫는 것도 아니고 그 눈치 빠른 인간들이 내 상태도 눈치 못 챌까. 그렇게 되면 곤란한 건 오히려 내가 아니라 너잖아.

"어라, 걱정해주는 거야?"

"전혀, 지켜줘야 하는 연약한 피해자가 되는 것이 싫을 뿐이야."

당신의 그런 자존심에 매번 이렇게 도움받고 있으니 감사해야 하나. 네 녀석의 감사 따윈 죽어도 받고 싶지 않거든? 그건 좀 서운한데. 서운해? , 네가 내게 한 일들을 생각하면 이 정도도 꽤 후한 편이지 않나. 결국, 그 후함이라는 것도 현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취하는 태도잖아. 그게 불만이면 처음처럼 대해주리? 당신이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나를 생각해준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2

"그래서 말인데 제이슨,"

"안 간다"

팀이 흘린 정보는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그리고 현재 딕 그레이슨이 제이슨의 세이프 하우스에 무단침입하여 제이슨에게 가족 모임 참여하는 것을 권유하고 있었다. 무단 가택침입은 불법이므로 GCPD에 신고하려다 그만두었다. 첫 번째 이유로는 제이슨의 눈앞에 있는 딕 본인이 경찰이었고 둘째로는 제이슨이 사는 세이프 하우스 역시 그리 합법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제이슨 토드와 딕 그레이슨을 같이 두었을 때 누구에게 호의를 가질 것인지가 너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딕의 외모는 제이슨도 인정할 정도로 남녀를 불문하고 호감을 얻기 좋았다.

"그러지 말고, ? 다시 생각해봐."

"애초에, 가족 모임이 내가 왜 가야 하는데?"

"그야 너도 우리 가족인걸."

돌아온 딕의 대답에 제이슨의 표정이 더 애매해졌다. 미친놈 보듯 했다는 게 좀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 팀만큼 미친놈도 잘 없다고 생각했지만, 딕 역시 만만치 않았다. 분명, 예전에는 가족이라고 받아들이려 했던 시기가 있었긴 했겠지, 하지만 결국 되지는 못했었다. 꼭 기록이 존재해야만 가족인 건 아니잖아. 그때 넌 이미 내 가족이었어, 제이슨. 팀이나 데미안에게도 시간이 필요한 거고, 이제 너도 어엿한 형이니 먼저 다가가 줘야지? 글쎄, 적어도 한 명은 그리 생각하지 않을 텐데.

"제이슨-,"

"어쨌거나 난 안가, 가더라도 이번은 아니고."

그러니 돌아가. 문단속 잘하고, 배웅은 안 한다. 제이슨은 그리 말하며 욕실로 들어가 버렸고, 딕 역시 제이슨의 확고한 의지에 단념하고서 돌아가고자 했다. 문을 부수고서 들어온 것은 아니었기에 문만 확실히 닫아도 문의 잠금장치가 알아서 자물쇠를 걸겠지. 딕은 현관문의 손잡이를 잡고 돌리려다 멈칫했다. 제이슨의 마지막 축객령이 다시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난 안가, 가더라도 이번은 아니고. 확실한 거절 의사였지만, 이것을 다시 뒤집어 보면 이번엔 안 간다는 말이 되기도 했다. 그러니까 즉, 다음에는 갈지 모른다는 말이었다. 딕은 지금 잡은 한 줄기 희망을 지금 당장 확인하고 싶었고, 그대로 뒤돌아 제이슨이 들어간 욕실 문을 덜컥 잡았다.

"제이슨 방금 한 말-"

벌컥 문을 열며 동시에 했던 딕의 말은 완전한 문장이 되지 못하고 끝을 맺었다. 딕의 눈에 그것보다도 중요한 일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돌아갈 거라 여겼는지, 상의를 완전히 벗은 채로 막 버클을 잡고 있었다. 문을 연 딕과 마주한 제이슨은 낭패 어린 표정을 지었고 딕은 제이슨 몸에 가득한 상처를 보았다. 이래서야 모임에 참여하지 않은 게 현명한 판단이었다. 찢어지고 빨갛고 파랗게 든 멍이 배꼽 위로 가득했다 교묘하게 제이슨의 목 언저리까지만 만들어놔서 제이슨이 옷만 입는다면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상체만 저 정도라면, 딕은 불현듯 떠오르는 불길한 예감에 딕은 제이슨에게 다가갔다.

", ! 뭐 하는 짓이야!"

굳은 제이슨 대신 버클을 잡고 바짓단을 내리려 하자 제이슨이 기겁하고 바지를 잡았다. --, 변태냐!! 미안해 제이슨, 확인만 할게. 딕이 강제로 벗기려는 것을 제이슨이 저항해 보았으나, 그는 이제 한 도시를 지키는 어엿한 자경단이었고 제이슨의 몸 상태도 멀쩡한 것이 아니었기에 막을 수 없었다. 결국, 딕 그레이슨 앞에서 바지를 벗는 수치를 당해야 했다. 제이슨의 이러한 굴욕감을 아는지 모르는지 딕의 시선은 제이슨의 다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제이슨의 다리에도 가득한 상처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레드 후드가 아무리 제 몸을 사리지 않는 자경단이라지만 이건 해도 해도 정도가 심했으며 단지 자경단 활동으로 입은 상처라고 보기엔 어려웠다.

"그래, 남의 바지를 벗기니 그리 속이 시원하냐."

"아니, 오히려 속이 뒤틀리는 기분인데."

제이슨이 약간 허탈한 심정으로 물으니 찌푸려진 얼굴로 딕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왜 다 큰 성인 바지를 벗기고 그러냐. 네 다리야 네가 로빈 시절 때 이미 충분하게 봤는데 감회가 새로울 게 뭐 있어, 그보다 그 상처 누구야? 딕의 혹평에 제이슨이 바지를 올려 다시 버클을 맸다. 딕은 제이슨의 상처를 지적하며 물었다. 글쎄, 오늘 상대한 놈들이 누구였더라. 어영부영 넘길 생각하지 마, 내가 그것도 구분하지 못할 것처럼 보여? 네 몸에 난 상처, 아무리 봐도 상처 내는 걸 목적으로 한 거잖아. 딕의 말에 제이슨이 작게 혀를 찼다.

"누군지 알아서 뭐하게?"

"당연히 못 하도록 막아야지."

제이슨은 둘러대는 대신 물었고 당연하듯 돌아오는 대답에 픽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네가? 잘도 그러겠네. 애초에 말릴 것 같았으면, 말려질 것 같았으면 이 지경이 되진 않았을 거다. 제이슨-.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다른 사람들에게 이 건을 흘렸다간 가만 안 둔다. 비밀로 한다고 하면 말해 줄 거야? 아니, 애초에 너한테도 알리고 싶지 않은데. , 그래? 제이슨이 강경한 태도를 보이자 딕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들어 어딘가로 걸었다.

"여보세요 알프레드? 저에요. 다른 게 아니라 며칠간 제이슨의 집에서 지내려고요."

전화를 건 곳은 제이슨도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여전히 제이슨을 제이슨 '도련님'이라고 불러주는 웨인 가의 집사 알프레드. 제이슨도 그 앞에서만큼은 유순해지긴 했으므로 딕이 알프레드라고 부를 때는 경계했으나 이어진 말이 더 충격이었다. 누가 누구랑 지낸다고? 집주인인 제이슨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결정을 내리는 딕에게 항의하기도 전에 알프레드의 체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괴롭히지만 마십시오. 섬세한 분이시니까요. 차라리 말려줘요! 제이슨은 소리치고 싶었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제이슨이 끼어들면 필시 제이슨의 상처 건에 대해서 알프레드 귀에 들어갈 테니.

"하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오랜만에 형제끼리의 우애를 다지려는 것뿐이니까. 브루스랑 다른 애들에게도 말씀해주세요. ."

통화를 끝낸 딕에게 무슨 짓이냐고 눈길을 주니 딕의 대답이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겐 비밀로 해달라 그러고, 누군지는 이야기해주지 않으니까 직접 알아봐야지. 혹 나를 쫓아낼 생각은 말아. 여기서 쫓아내면 전부 이야기해 버릴 테니까.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제이슨에게 유리한 것은 없었다. 이럴 때의 딕의 고집은 꺾을 수 없으므로, 제이슨은 타협하기로 했다. 알프레드가 팀에게 알리면 팀도 행동에 신경 쓸 테니 곤란한 상황은 오지 않을 것이었다. 적당히 하다 떨어지길 바라야지.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그리고 좀 씻게 좀 꺼져라. 그래, 그럼 씻고 난 뒤 약 발라줄게. 연고는 있지? 딕이 욕실을 나가며 물었고 제이슨은 대충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 서랍장. 성의 없는 단서였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제이슨은 팀을 얕보고 있었다는 것을 씻고 나서야 깨달았다. 샤워를 간단히 마치고 방으로 나오니 딕이 사라졌다. 뭐야, 그새 질려서 나갔나? 때맞춰, 문이 열리며 차가운 기운과 함께 딕이 들어왔다. 벌써 다 씻었어? 키트에 약이 없길래 약을 좀 사 왔어. ? 딕의 말에 제이슨이 황급히 키트를 확인했지만 딕의 말이 맞았다. 키트는 텅텅 비어있었다. 이런 일이. 제이슨은 상처를 입으면 달리 치료해 줄 사람이 없었으므로 구급 키트 안의 약품들이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관리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부족한 것도 아니고 텅텅 비어있다니, 황당한 일이었다. 누군가의 소행이겠지 제이슨의 상처 치료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 팀 드레이크- 그새 제이슨의 세이프 하우스를 턴 모양이었다.

"제이슨? 왜 그래?"

", 좀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이 생각나서."

제이슨의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눈치챈 딕이 물었고 제이슨이 대답했다. 예를 들어, 널 이렇게 만든 사람이라던가? 딕이 은근슬쩍 웃자 제이슨이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그래, . 농담하지 말고, 제이. 사실이잖냐,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와서 편히 쉬지도 못하게 만든 사람. 딕이 제이슨을 샐쭉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 쉽게 이야기해 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재밌겠네, 누가 이길지."

그렇게 말하는 딕을 제이슨은 흘깃 쳐다보았다. 딕은 확실히, 누가 보아도 난 놈이었다. 로빈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로빈이었기도 했고 이제는 혼자서 다른 도시를 지키는 자경단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숨기고자 하는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팀 역시 그러할 것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딕이라면 제아무리 뻔뻔한 놈이라도 숨기려 하겠지. 거기다 팀을 향한 그의 신뢰가 집요한 딕의 눈을 가릴 것이 분명했다. 딕이 왜 승부 쪽으로 말을 띄웠는지 모르겠으나 여러모로 제이슨에게 유리한 것이 많았으므로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어쭈, 자신만만하다?"

"물론, 자신 있지."

너도 알다시피 내가 지는 걸 싫어하잖니, 그리고 너랑 싸워서 내가 진 적이 있던가 제이버드? 딕의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제이슨의 표정이 절로 구겨졌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나 열 받는 것은 사실이었다. 글쎄 그건 어떨까, 이쪽은 둘이고 넌 혼자잖아. ? 노파심에 묻는 거지만 제이슨 너 혹시 그쪽 취향을 가진 건 아니지? 하아? 그럴 리가 없잖아. 다행이다. 혹시 네가 합의하고 한 거라면 내가 지나친 참견을 하게 되는 거니까 걱정했어. 지금도 충분히 지나친 참견인데.

 

"찾는 건 잘되가?"

오랜만에 딕과 외식을 하게 된 팀이 딕에게 물었다, 거두절미하고 물어와 딕은 팀이 무엇을 묻는 것인지 고민해야 했으나 곧바로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 갑자기 제이슨의 세이프 하우스에서 며칠 지내겠다고 했었잖아. 그래서 생각했지 제이슨이 대답을 안 해줘서 찾으려 하는 거구나 하고. 단순히 변덕으로 제이슨의 세이프 하우스에 있겠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딕 웬만하면 웨인 저에서 지내니까. 팀의 대답에 딕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연, 그렇게 생각할 가능성도 있었다. 제이슨의 고집에 충동적으로 결정을 내렸던 데다가 별다른 핑계도 되지 않았으니 받아들일 만한 이유를 찾았을 것이고 그게 제이슨과 관련된 것이란 것까지 충분히 추측했을 것이었다.

"전혀, 제이슨이 입을 꽉 다물고 있어. 실수로도 정보를 흘리지 않더라."

차라리 제이슨이 이상한 행동이라도 보인다면 파고들기라도 하지. 달리 숨기는 기색도 없었으며 모든 행동이 자연스러웠고 오히려 편해 보이기까지 했다. 상처도 점점 아물어가고 다른 상처도 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딕이 온 이후로 제이슨에게 무언가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제이슨에게 아무 일이 없는 것은 좋았지만, 덕분에 작은 단서도 얻을 수가 없었다. 역시 제이슨이 말해주길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다는 건데, 앞으로도 이야기할 계획은 없어 보였다. 자신이 그렇게 못 미더운 것일까? 그런 의문을 마치 듣기라도 한 듯 팀이 대답했다. 딕이 못 미덥기보다는 딕이 파해치길 원하지 않는 게 아닐까. 제이슨은 자존심이 강한 편이잖아 딕에게 도움을 청하는 건 제이슨에게 있어서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히는 일이 될 테니까.

", 그런가. 넌 어때? 제이슨에게 뭐 들은 거 없어?"

"?"

",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까."

딕의 질문에 팀이 쓰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글쎄, 나랑 제이슨은 그리 긴밀한 사이가 아니니까. 오히려 나보다도 딕이 더 많이 알걸? 하지만 둘이 꽤 자주 만나잖아, 이따금 식사도 하고. 일 때문에 만나는 거지. 제이슨이 웨인사에 올 일도 없을 테니 밖에서 같이 볼 때가 식당이나 카페뿐이잖아. 그래서 둘이서 식사할 때가 잦지. 먹으면서 대화도 하잖아. 일 쪽으로만 서로 물어볼 게 끝나면 조용히 식사만 해. 그렇구나. 팀이 그리 살가운 성격이 아니라지만 둘이 자주 만나는 것 치고는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는 것은 꽤 충격이었다. 이런 일로 팀이 제게 거짓말이야 하지 않겠지만 어쩐지 석연찮은 기분이었다.

"그러는 팀이야말로 요즘 무슨 일 있어?"

얼굴색이 안 좋아, 며칠 전만 해도 이렇진 않았는데. 딕이 걱정스럽게 말했고 팀은 제 손으로 제 얼굴을 쓸며 물었다. 그렇게 나빠? 상당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잘 안 풀리는 일이 있어서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좀 예민해져서 잠을 설쳤더니 이렇게 됐네. 그래? 네가 스트레스 받을 정도라니, 내가 좀 도와줘? 딕은 제이슨의 일도 있잖아, 괜찮아. 딕은 걱정스럽게 팀을 쳐다보았지만, 팀은 손을 내저으며 자기는 괜찮노라고 제이슨일 에 집중하라며 딕을 독려해주었다.

 

3

"팀이 안 좋다고?"

제이슨의 세이프 하우스로 돌아온 딕은 제이슨을 떠볼 겸 팀의 이야기를 흘렸다. 시큰둥하게 듣던 제이슨이 팀의 안색이 안 좋다는 소리에 고개를 획 돌려 딕을 향했다. 안색이 안 좋다는 소리에 이렇게 쳐다보는데 팀의 말대로 마냥 서원한 사이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팀은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라고 못을 박았던 것일까, 설마 큰 형인 자신이 서운해하는 것을 걱정했었나? 아니 팀이 저를 잘 따르긴 하나 그런 쪽으로 신경을 쓰진 않을 터였다. 대체 왜 팀은,

"딕 그레이슨!"

"?"

딕이 대답하자 제이슨이 인상을 찡그렸다, 너 내 말 듣고 있냐. , 팀 말이지? 요즘 잘 안 풀리는 일이 있어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더라고, 그것 때문에 예민해져서 잠도 잘 못 잔다더라. , 그래? 잘 안 풀리는 일이라-. 팀이 걱정돼? ? 딕의 질문에 제이슨이 황당하다는 듯이 물었다. 내가 걔 걱정을 왜 해? 왜냐니. 딕이 입을 다물자 제이슨은 짜증이 솟구쳤다. 저놈은 말 히려면 시원스럽게 말하던가 왜 중간에 말을 끊-. 제이슨의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딕이 자신을 잡아 획 돌려 거울 앞에 서게 만들었고 제이슨은 제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그런 걱정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 왜냐고 물어도 말이지."

제이슨은 거울을 보고서도 믿기지 않는 듯 손을 올려 제 얼굴을 더듬더듬 어루만졌다. 언제부터! 거울에 비친 것이 제 얼굴의 표정이란 것을 인지하자 제이슨은 짜내듯 소리쳤다. 언제부터 이런 표정이었는데? 팀이 안색이 안 좋단 소리를 듣고 나서부터인데? 제이슨은 무엇이 그리도 충격인지 양손에 제 얼굴을 묻었다. 제이슨? , 혹시 자각을 못 하고 있었던 거야? 팀을 좋아하는 거. . , 세상에 몰랐구나. 아니 뭐 그럴 수도 있지, 사람을 좋아하는 특별한 계기가 없어도 시나브로 깊어질 때도 있으니까. 그래도 네가 팀을 아끼고 있다니 형으로서 난 참 기쁜데. 형제끼리 서로 좋아하고 아끼면 좋잖아.

"헛소리 하지 마, 난 걔를!!!"

홧김에 소리쳤지만, 제이슨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목 끝까지 올라온 그 말들은 딕에겐 할 수 없던 것이었으므로. 왜 팀 드레이크를 좋아해서는 안 되며. 그가 자신에게 무슨 짓을 했고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팀 드레이크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예민해졌는지조차도 딕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말하면, 말했다간-. 제이슨? 팀이 왜? 팀이 너한테 뭔가 했었어? 제이슨이 말을 끊어 버리자 딕이 재차 물으며 걱정스레 제이슨을 불렀으나. 제이슨은 더는 누구와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나가."

제이슨은 막무가내로 딕을 세이프 하우스 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했고 어쩐지 혼란스러워 보이는 제이슨을 본 딕이 강하게 저항도 못 하고 세이프 하우스에서 쫓겨났다. 가서 다 불든 말든 마음대로 해! 짐도 옳게 챙기지 못한 채 쫓겨났으나 며칠 머물렀던 것 치고는 딕의 물건이 적었으므로 곤란한 일은 없었다. 혼란스러워 보이니 오늘은 혼자 두고 내일 다시 찾아오면 되고, 다시 팀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 이유가 생겼다. 제이슨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표정이었다. 화를 내고 비아냥거리는 일은 많았지만 울 것만 같은 표정은 거의 처음이었다. 아마 제이슨 한쪽만의 일은 아닐 거라는 묘한 확신이 들었다.

 

"? 완전히 돌아온 거야?"

웨인 저에 들어오니 마침 부엌에서 나가던 팀과 마주쳤다. 손에는 하얀 김이 올라오는 것이 자신이 마실 커피를 내려 가지고 가던 중인 모양이었다. 아니, 제이슨이 혼자 있고 싶대서 오늘은 혼자 있게 두려고, 아마 오늘은 패트롤도 하지 않을 거야. 패트롤도? 무슨 일 있는 거야? 팀은 의아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물었다. 글쎄. 제이슨의 얼굴을 떠올린 딕이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만큼은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패트롤을 쉬면서까지도.

"그보다 팀, 제이슨이랑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이라니?"

딕이 말을 돌리자 팀이 의아히 물었다. 말했었잖아, 나랑 제이슨은 무슨 일이 있을 사이가 아니라고. 그래? 그런 거 치곤 제이슨이 널 많이 신경 쓰던데. 제이슨이? , 네가 안색이 안 좋다고 하니까 신경 쓰더라, 널 걱정하는 게 아닐까 해. 그 사람이 내 걱정을? 아닐 텐데. 왜 아닐 거라고 확신해? 팀의 중얼거림을 들은 딕이 팀에게 물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라도 있어? 이유?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을 걱정할 리가 없지 않아? 팀은 제이슨이 널 싫어한다고 생각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로빈을 빼앗은 셈이 되고, 달리 좋아할 만한 이유도 없지 않아? 하지만, 우린 가족이잖아? 서로 공통점도 있고, 브루스가 위험하면 언제든 도와주러 오기도 하지 네게 그러지 않으리란 법은 없어 티미. 아니면 제이슨이 그러지 않을, 널 그만큼 싫어할 만한 이유라도 있는 거야?

딕이 찾고자 하는 사람이 나니까. 팀은 그 사실을 입 밖에 내는 대신 애매한 미소로 화답했다. 제이슨에게 상처를 입힐 목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며, 팀이 낸 꾀 덕분에 가만히 당하고 있었으나 그라고 맞는 것이 좋을 리는 없었고 그 강한 자존심에 매번 상처 내고 있으니 제이슨이 팀을 좋아하는 것이 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 팀의 상태를 신경 쓴 것은 언제 제게 닥칠지도 모르는 위협이 신경 쓰이기 때문일 것이 분명했다. 팀의 비틀린 애정을 받고서도 제이슨이 저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사람의 마음은 간사해서 딕의 말대로 제이슨이 저를 좋아해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딕의 말처럼, 제이슨이 나를 좋아하는 거였으면 좋겠다."

4

제이슨은 웨인 저택 앞에 서서 한참을 서 있었다. 딕을 그렇게 쫓아낸 뒤, 다음날 딕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제이슨의 세이프 하우스로 돌아왔었다. 팀을 의심하지 않았을 딕이 제 일을 팀에게 흘렸을 것이었다. 그래도, 팀은 제이슨을 찾지 않았다. 제이슨의 몸에 상처가 낫는 것을 원하지 않는지 상처가 아물 즈음에 찾아오던 녀석이 다 아문 후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제게 말하던 대로라면 제이슨의 몸에 상처가 아무는 것을 못 견뎠을 텐데도, 어쩌면 그가 말하던 제이슨에 대한 애정이란 잠시간의 공백만 있다면 쉽게 식어버리는 것이었을지도. 결국, 저만 우스운 꼴이 된 것이다.

그리고 더 우스운 것은, 팀이 다쳤다는 소리에 한달음에 웨인 저로 찾아간 자신의 모습이었다. 가뜩이 잠이 부족한 고담의 자경단님께서 더 예민해진 탓에 잠을 자지 못했고, 결국 그것이 쌓여 패트롤을 돌던 중에 상처를 입은 것이었다. 사경을 헤맬 정도의 큰 상처도 아니었으나, 충격과 함께 그동안 쌓여있던 수면 부족이 터져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고, 그러니 예의 차 문병을 가는 것이라도 약간 과한 감이 있었으므로 팀과 그리 친밀한 사이도 아닌 제이슨이 가기에는 퍽 이상했다. 하지만, 제이슨은 돌아가지 못하고 기어이 안으로 들어갔다.

"제이슨? 팀이 걱정돼 온 거야?"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웨인 저의 그 누구도 제이슨의 방문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한동안 같이 지냈던 딕은 제이슨이 팀을 보러 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브루스와 알프레드는 제이슨이 팀을 걱정해서 찾아온 것이 무척 달갑게 여겨진 모양이었다. 데미안? 그는 제이슨이 딕의 과장된 이야기에 속아 팀을 문병 왔는 것이라 오해하고 있었다. 가장 다행인 것은 제이슨이 찾아온 팀이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는 것으로, 만약 팀이 깨어 있었다면 제이슨은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무척 곤란했다. 상처도 깊지 않고 단지 잠든 것이라 배트맨 패밀리의 얼굴도 다소 안정적이었다. 알프레드는 이참에 팀이 푹 자길 바라는 눈치였다.

제이슨이 미처 운을 떼기도 전에 이 노련한 집사는 조용히 제이슨을 팀의 방으로 안내했다. 처치는 끝났는지 팔에는 붕대가 조금 감겨 있었고, 팀은 고요한 얼굴로 자고 있었다. 이렇게만 보면 썩 예쁜 얼굴인데 말이지. 공교롭게도 팀은 선이 고운 편에 속하는 편에다가 제이슨을 이따금 만나러 올 때도 그 고운 얼굴을 더 없이 빛낼 웃는 얼굴로 제이슨을 대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제이슨은 팀의 고운 얼굴을 곱게 봐줄 수가 없었었다. 팀을 바라보는 제이슨을 배려하여 노집사는 가만히 문을 닫고 나갔고 팀의 방에는 제이슨과 팀만이 남아 있었다.

눈에 들어온 팀의 팔에 감긴 붕대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인상을 찡그렸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제이슨으로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필이면 팀 드레이크를 좋아하게 되다니! 그는 제이슨에게 애정이라는 이름으로 이유 없는 폭력을 행사했었고 제이슨은 그것이 끔찍하게 싫었다. 일방적인 구타나, 통증, 그리고 한동안 몸에 남아 있는 상처 자국도 제이슨에겐 결코 좋은 기억이 아니었다. 특히 머리가 울릴 정도가 되면 끔찍했던 어떤 날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에 더욱이. 그런 더러운 기분을 매번 맛보게 하는 상대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그가 내뱉은 허울 좋은 사랑 고백과 애정표현에 넘어가서.

팀이 입은 상처를 보는 것만으로 속이 상했다. 차라리 아프지나 말지. 항상 멀쩡한 채로 저를 괴롭히기만 했다면 이렇게 속이 상하고 아프진 않았을 텐데. 팀이 아픈 게 속상하고 그런 그를 걱정하는 것이 너무 싫으면서, 또 얼굴을 보고 얼굴을 보면 팀이 제게 행했던 폭력을 그리고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연거푸 떠오르는 생각에 가슴이 이렇게 아픈 게 무엇 때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확실한 건 팀의 상처가 낫는다면 조금 덜 아프리라.

"당신이 그 표정을 나 때문에 지을 때도 있네."

문득 들린 목소리에 팀의 얼굴을 쳐다보니 어느새 눈을 뜨고 있는 팀이 있었다. 깨어 있었냐. 방금 깼어, 봐 목소리가 다 잠겼잖아. 그러냐. 팀은 몸을 일으키려는 듯 제이슨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제이슨은 손을 마주 잡는 대신, 혼자서 해 하고 퉁명스레 대답했다. 팀의 하얀 손은 이제 약간의 거부감까지 들었다. 오랫동안 그의 폭력에 노출된 결과였다. 그리 심한 부상도 아니었으므로 팀은 별 무리 없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당신이 그런 표정을 나 때문에라도 지을 수 있다는 걸 좀 더 빨리 알았으면 좋았을 걸, 난 당신이 내게는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했었거든. 그래서 예의 그 방법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고 생각했거든. 손쉬운 방법이라는 건 틀린 게 아니지만, 그걸 택하면 포기해야 하는 것도 있으니까.

그런데, 오늘 당신이 보인 표정이 그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해주네. 딕은 참 대단해. 찾던 사람이 나라는 건 아직 모르고 있지만, 내가 몰랐던 걸 알고 있었어. 딕이 묻더라고 왜 네가 날 싫어하리라고 생각하냐고. 당신이 나도 좋아해 줄 거라고 이야기했었어. 그놈은 천성이 그런 놈이야, 모든 일을 좋게 바라보지. 부정적으로 생각하다 잘못된 길을 가는 것보단 낫지 않아? ……. 하하, 내 말이 맞지?

"제이슨-,"

"."

"날 어떻게 생각해?"

 

5

"역시 넌 미친놈이야."

"제이슨, 전에도 말했듯이 난-"

"지극히 이성적이라고? 그래도 넌 내게 미친놈이야, 이 이성적으로 미친놈아."

패트롤 돌다가 다쳐서 배트 케이브에 가는 게 아니라 내 세이프에 와서 실실 웃고 있으면서 이성적이라고? 심각한 부상도 아닌데 굳이 케이브의 시설을 이용할 필욘 없지. 게다가 다쳐서 네게 오면 넌 내가 좋아하는 표정을 지어줄 거고 처치도 해줄 텐데, 웃지 않을 이유도 없지 않아? 그날 이후 팀은 제이슨에게 향하던 애정을 빙자한 폭력을 멈추었다. 오랫동안 이어져 오던 행동이었음에도 팀은 버릇 하나 들지 않았고 제이슨만이 팀의 작은 행동 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오랫동안 폭력에 노출되어온 제이슨이었기에 당연한 반응이었으나 그런 제이슨을 발견할 때마다 팀은 행동을 잠깐 멈추었다.

제이슨은 팀의 자행해오던 일들의 결과였고, 팀은 제이슨의 몸에 새겨진 자신을 기뻐해야 했다. 팀은 지금까지 그래왔으므로. 하지만 팀은 기쁜 표정이 아니라 아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그날의 일은 확실히 팀에게는 크고 특별한 일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렇게 단 하루를 기점으로 사람이 바뀔 수가 있는 것인지. 갑자기 바뀐 팀의 태도가 제이슨의 속을 헤집었다. 아직도 선명한 기억들을 마치 한순간의 환상처럼 만들어 괴로웠다. 괴로웠다. 그러나 팀 드레이크를 사랑해버리고 만 제이슨은 팀을 제 세이프 하우스로 쫓아내는 대신 팀의 상처를 치료해주었고 팀은 그것을 무척 기뻐했다.

기어코 제이슨으로부터 대답을 듣고도 팀은 제이슨이 자신을 걱정했다는 것이 퍽 신기한지 이따금 다쳐서 제이슨 앞에 모습을 드러내며 제이슨의 일그러진 표정을 확인했다. 그리고 제이슨이 저를 치료하는 것을 약간 현실감이 떨어진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제이슨이 약간의 짜증과 속상함을 담아 팀의 등짝을 치지 않았다면 팀은 여전히 붕 뜬 얼굴로 저를 찾아왔을 것이었다. 아마도 손자국이 선명하게 났을 등을 쓸면서 팀이 제이슨에게 괜찮은지 물었었다. 제이슨은 팀의 폭력의 피해자였고 팀이 행동을 멈추었다고 한들 정신적인 상처가 금방 낫는 것은 아니었으며 제이슨은 어쩌면 그것을 평생 안고 갈 수도 있었다. 과연 미쳐도 이성적으로 미쳐선지 팀은 제이슨이 받은 상처를 신경 썼고 약간의 죄책감 역시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 번은, 제이슨이 좀 괜찮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며 제안해왔지만, 팀이 아주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것은 제이슨도 곤란했다.

그냥 보이는 곳에 있어.

다치지 말고

가끔은, 아주 가끔은 찾아와도 괜찮아.

팀이 보이지 않으면, 다치면 걱정되니까. 그리고 보고 싶고 대화도 하고 싶으니까. 제이슨 토드는 팀 드레이크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때문에 팀은 제이슨을 찾아올 때면 필요 이상으로 기분이 좋아보였다. 싱글싱글 웃는 것이 제이슨의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지만 그뿐이었다. 먼저 접촉해오지 않았고, 그러고 싶으면 제이슨에게 먼저 허락을 구했다. 그리고 제이슨은 팀의 열망을 허락하듯 입을 맞추면, 팀이 그것을 받았다. 물론 그 이상을 원하는 날에는 가차없이 쳐냈다.

"안돼?"

"안돼."

제이슨은 팀에게 앙갚음이라도 하듯 관계를 갖는 것에 엄격한 기준을 세웠다. 상처가 없는 상태에서 할 것, 살짝 스치는 상처 또한 포함이라서 자경단 일을 하는 팀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조건이었다. 그 위에 자신의 몸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는 제이슨까지 포함한다면 정말 낮은 확률이었다. 가뜩이나 만나는 횟수도 적은데 그 낮은 확률을. 팀의 아쉬워하는 얼굴을 보며 제이슨이 기분 좋게 너른한 웃음을 지었다.

제이슨 토드에게는 한 명 정도는 알아도 상관없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팀 드레이크가 자신을 사랑하며, 제이슨 토드 역시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비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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