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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08 브루슨? 잘자요 브루스

쿠오니 2022. 4. 8. 19:55

잠이 오질 않는다. 오늘도 졸음이 오지 않은 맑은 눈을 깜박였다.푹신푹신한 침대, 부드러운 이불, 금방 잠이 쏟아질 것 같은 말랑말랑한 배게 모두 제이슨의 편안한 잠자리를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모두 제이슨의 것이었다. 크라임앨리에서 생활할 적에는 꿈도 꾸지 못할 호사라 공연히 마음이 불편했다. 그를 데려온 브루스도, 브루스를 보필하는 알프레드도 심지어 저를 이따금 놀러먹는 리처드마저도 이것이 제이슨의 것이라고 말하는데, 영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했다.

물론 제이슨도 처음부터 이리 불편했던 것은 아니다. 항상 누리던 것의 수배는 좋아진 환경에 놀라고 감탄하며, 한편으로 걱정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설렘에서 오는 반응일 뿐 수면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그것도 하루이틀일이지 그런 설렘이 며칠까지고 계속될 일이 없었다, 제이슨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이 이후에 있었다. 꿈만 같다는 말을 하긴 했어도 정말 꿈처럼 여긴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제이슨은 누리던 이 모든 것이 허상으로 돌아가는 꿈을 꿨다. 악몽이었다. 누리던 모든 것을 잃는 것보다 겨우 찾은 기댈 곳, 유대할 수 사람 사라졌다는 것이 무엇보다 무서웠다. 그렇다고 악몽이 무서우니 같이 자자니 다 큰 애가 이 무슨 부끄러운 꼴이란 말인가. 결국 제이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방으로 들어왔고 지금에 이르렀다.

눈을 감고 있으면 잠에 들지도 모르겠지만 이대로 잠들어도 좋은 꿈은 꾸지 못할 것이다. 내려가서 따뜻한 우유라도 먹으면 잠이 잘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제이슨이 침대에서 몸을 내렸다. 소리가 나지 않게끔 살짝 문을 열고 나온 제이슨은 발소리를 죽여 부엌으로 향했다. 그 주인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는 데 성공한 제이슨은 또 익숙하게 머그컵에 따라 전자레인지로 우유를 데웠다. 화면에서 줄어드는 숫자를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자니 의외의 인물과 마주쳤다.

"제이슨?"

"아, 웨인씨."

브루스라 부르래도. 제이슨의 딱딱한 호칭에 설핏 서운한 티를 내었다. 그야 속으로는 그의 이름을 친밀하게 부르고 있지만, 억소리나는 부자인 브루스를 제이슨이 소리내어 입에 담는 것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무슨 일이니? 밤늦게까지 깨어있는 제이슨을 보며 한걸음에 달려온 브루스에, 제이슨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잠이 오질 않아서요, 데운 우유라도 마시려고요. 따뜻한 것을 마시면 긴장이 풀어져 잠을 자기 쉬워지지. 무슨 일이라도 있니? 목소리에 묻어나는 자상함에 제이슨이 입술을 깨물었다. 브루스는 배트맨이었고 자신은 로빈으로 선택받아 이곳에 왔다, 자신이 악몽 때문에 잠들 못한다고 하면 실망하고 자신의 선택을 번복하지 않을까.

"그보다 저는 언제부터 활동 할 수 있나요?"

"너를 곧바로 실전에 투입하지는 않을거란다. 충분한 훈련기간을 거친 뒤에야 가능하지. 그러기 위해선 네가 잘 먹고 잘 자는게 중요하다만 잠을 잘자는 것 같진 않구나."

깨물었던 입술을 향하던 브루스의 시선 이제는 제 얼굴을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며칠씩이나 설친 얼굴은 사실 좋게 말해도 건강한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조금, 악몽을 꿔서요. 어렵게 어렵게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었다. 그래? 힘들었겠구나. 따듯하게 데워진 머그컵을 내미는 브루스를 보며 제이슨이 물었다. 실망하지 않으세요? 실망할 일이 있었니? 악몽을 꾼 정도로 무서워서 잠을 잘 못자잖아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도 악몽이 무서워서 잠을 자기가 두려워."

"배트맨인데도요?"

"그래, 이런 배트맨이라 실망했니?"

"아뇨, 놀라긴 했지만 실망하지 않았어요."

"그게 내 대답이란다."

따뜻한 우유를 한 모금 마셔서 그런가 기분이 조금 뭉그러졌다. 앉아서 먹으렴. 부엌의 의자까지 내주는 친절함에 제이슨이 그 말에 따랐다. 그는 부엌에 용무는 없어보였으나 제이슨이 떠날 때까지 그 자리에 머물것 같아 이참에 궁금한 것을 묻기로 했다.

"당신도 악몽을 꾸나요?"

"매일 꾸지."

"오 저런. 많이 무섭겠다, 힘들진 않나요?"

"...익숙하단다."

익숙하다 말하는 그의 얼굴은 꽤 지쳐보였다. 하기사 제이슨도 한번 꿨던 꿈 때문에 며칠씩 잠을 설칠 정도인데 그는 어떻겠는가. 매일매일 잠들때마다 꿈을 꾼다면 제이슨은 잠을 포기할 것이다. 그가 무슨 악몽을 꾸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저를 괴롭히던 악몽의 잔재를 거둬준 것처럼 그를 도와주고 싶었다.

"이건 비밀인데, 사실 고아원에서 잠을 잔적이 있어요."

시설이 꽤 좋진 않았지만 집이 없는 아이들을 재워주는 곳이 있었거든요. 벌이가 시원치 않을 때는 일부러 그곳에 가기도 했거든요. 거기 아이들도 악몽에 시달릴 때가 있었는데 메기가, 아 그러니까 그 고아원에서 가장 나이가 많는 애가 악몽을 꿀까 무서워하는 아이들에게 해주는 주문이 있어요. 잘자라는 인사인데, 그 애가 아이들에게 그렇게 인사하면 아이들은 이상하게도 그날은 악몽을 꾸지 않게 되요.

"그 애만큼 잘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내가 당신에게 인사를 해도 되나요?"

"부디."

"잘자요, 브루스."

"...잘자렴, 제이슨."

제이슨은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우유를 벌컥벌컥 마시고 잔을 내려 놓았다. 인사를 해준건 자신인데, 오히려 자신이 악몽을 꾸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난 그럼 가볼게요! 게다가 뭔가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어 브루스의 얼굴을 보면 빵하고 웃음이 터질 것 같기에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다시 누운 침대 위는 차갑게 식어있었지만 여전히 푹신하여 그를 잠의 세계로 이끌어줄것만 같았다. 잘자렴, 제이슨. 다시금 그 화답이 떠올라 입꼬리가 내려가질 않았다. 좋은 꿈을 꿀것만 같은 밤이었다.






"영감...아직도 이걸 가지고 있었구나."

케이브의 주인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이곳을 찾은 제이슨은 낯익은 물건을 발견했다. 사용감이 있다못해 손떼묻고 너덜너덜한 카세트는 오래전 브루스를 위해 제가 샀던 물건이었다. 매일매일 악몽을 꾼다던 브루스에게 매번 제가 인사를 해줄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그럴 수 없으니까 제 인사를 녹음해 브루스에게 건내주었다. 잘자란 그 한마디한 하면 될것을 괜히 쑥쓰러워 주변잡기를 털어놓기도 했었지. 팀도 모자라 데미안까지 있는 마당에 아직도 가지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오셨습니까 제이슨 도련님. 오, 그건 아주 그리운 물건이네요."

주인님께서 그걸 두고 가셨습니까? 별일이로군요. 제이슨의 방문을 알아챈 알프레드가 그에게 인사를 건내고, 손에 들린 물건을 주목했다. 영감탱-아니 브루스가 이걸 들고 다녀? 들고다닐 뿐이겠습니까, 몸에서 떼고 다니지 않을 정도로 아주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습관적으로 튀어나간 말을 알프레드의 눈길에 바로 고치며 물으면 새로운 사실을 알기 되었다. 자신조차도 잊고 있던 물건을 소중히 다루고 있다니, 가슴 한켠이 간질간질해졌다. 그런 제이슨의 의중을 살핀 듯 알프레드가 한마디 더 얹었다.

"처음 그것을 받았을 때 도련님께서 주셨다고 제게 슬쩍 자랑하셨던게 아직도 선명히 기억납니다."

"그으래?"

몇번이고 감고 들었던 지 특정 버튼만 유독 닳은 것이 보인다. 이렇게 닳을려면 얼마나 들어야 하는건지. 제이슨 슬쩍 다시 카세트에 시선을 주면 알프레드가 말을 덧붙였다. 이전에는 물론 지금까지도 듣고 계시답니다. ...안 물어봤어. 저도 그냥 이야기 한겁니다. 제이슨은 손에 든 카세트면을 살살 쓸다 다시 제자리에 올려두었다. 그렇게 듣는다면 또 찾으러 올것이니 제자리에 두는 게 좋겠지. 어짜피 이 낡은 카세트는 닳아빠져서 제 수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녀석도 꽤 오래버텼지요. 이참에 새로 선물하시는게 어떻겠습니까."

도련님의 목소리도 그 때와 많이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지금의 목소리로 새롭게 만들어주신다면 주인님께서도 분명 기뻐하실겁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그것을 듣는지 모르겠지만, 카세트가 수명이 다하여 더이상 소리를 내지 못하면 허전해지겠지. 목소리가 달라진 것도 있지만 더이상 그때의 제이슨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그것을 기뻐할까? 저를 아끼는 알프레드의 낙관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 제이슨은 결국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돌아갔다. 이후 웨인저로 발신인 불명의 소포가 도착하는 것은 조금 더 나중의 일이었다.






"주인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가벼운 노크와 함께 알프레드가 허락을 구했으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주인님?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어, 문고리를 돌렸다. 쉬이 열리는 문의 저편으로 그의 주인이 책상에 엎드려 잠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한 손에는 얼마전에 도착한 발신인 불명의 소포로 제이슨이 알프레드가 했던 말을 기억해 새로 보내준 것이었다. 일부러 자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돌려줄 정도로 기뻐하더니 오늘도 그것을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평소라면 좋지 않은 자세라 흔들어 깨웠겠지만, 곤히 잠든 것을 본 알프레드는 깨우기 보다 그 위로 담요를 덮어주기로 했다. 가지고 온 물건을 책상 한쪽에 올려두고 가져온 담요를 덮어주면 그의 손에 쥐어진 그것이 아직 재생중인 것이 눈이 들어왔다. 제이슨의 인사가 저택의 누군가에게 알려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가 직접 부수러 올지도 모르는 일로 제가 아끼는 두 사람을 위해 손을 뻗었을 때였다.

잘자요, 브루스. 사뭇 부드러운 어조의 목소리가 들리며 이윽고 재생이 멈추었다. 말이 끝나자마자 멈춘것을 보면 말하고서 부끄러워 황급히 껐을것이다. 이 메세지를 제 주인은 들었을까? 들었다면 예전과 인사가 다르다고 섭섭해하지는 않았으리라. 새로운 인사도 제이슨다워 좋다고 했으니 앞부분에 또다른 인삿말이 남겨져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알려주어야 할까? ...당장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 두고보다 계속해서 알아채지 못한다면 넌지시 알리면 된다. 그는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는 탐정이니까.







[이 편지는 미국 고담시로 부터-... 알프레드에게 들었어. 당신 요즘도 듣고 있다며? 아직도 악몽에 시달리고 있어? 영감 곁엔 말 잘듣는 아들들이 세명이나 있잖아. 뭐가 문제야? 뭐가 그렇게 불안한데. 당신 혼자 하기 힘들면 알프레드도 있고 딕도 있고 팀도 데미안, 걔도 있잖아 그리고 나도 있고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잘자라고 영감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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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자요, 브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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