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려다본 하늘은 우중충한 회색빛으로 묵직한 구름들이 금방이라도 빗줄기를 쏟아 내릴 것 같았고, 사방은 칙칙한 건물들이 비뚤빼뚤 자리잡고 있었다. 거리는 사람이 떠난 곳처럼 스산하고 처량해보였다. 거리를 덮는 분위기는 음울해서 그 자리에 선 팀 조차도 그 분위기에 동화될 것만 같았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려 고개를 돌아보니 외눈을 한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큰 키에 잃어버린 한쪽 눈, 불편해보이는 한쪽다리. 큰 덩치에 두꺼운 워커, 그리고 허벅다리에 위치한 총. 팀은 조금 달라져버린 외모에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제이슨?"
이었다. 마찬가지로 팀을 알아본 제이슨이 잠깐 놀라더니 이내 팀의 손을 낚아채듯 잡고 도망치듯 그 장소를 벗어났다. 가타부타 설명도 하지 않은 채 잡아끄는 제이슨을 따라 팀도 움직였다. 저항하려 한다면 할 수 있었겠으나, 제이슨이 제게 해코지 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그를 믿고 따랐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은 팀이 있던 장소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음습하던 거리의 외각쪽에 자리 한 곳의 집이었다. 겉은 버리진 집의 행색이었으나 내부는 생각보다도 깔끔했고 아늑했다.
제법 사용한 감이 있는 가구들 하며, 썩 괜찮게 관리 된 것이 제이슨의 안전가옥인 모양이었다. 여긴-. 세이프 하우스.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도록해. 당분간이라면? 네가 돌아갈 때 까지.
제이슨의 세이프 하우스에서 지낸지 한 달이 지났다. 제이슨은 팀이 세이프 하우스를 나서는 것을 꺼려했고, 팀도 그를 배려해 굳이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해서 알아볼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밖에 나가지 않는 팀을 배려해 팀이 읽을만한 책들을 가져오곤 했다. 하나같이 원래 팀이 있던 때에 출간 된것들 뿐이라 제이슨의 조심성에 혀를 내둘렀다. 팀은 원래 책을 좋아하는 편이긴 하나 이렇게 집 안에서만 지내는 것도 슬슬 신물이 났다.
집 안에서 책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제이슨은 팀과 만난 이후로 어떤 것도 팀에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여기가 어딘지, 언제인지 그 모습은 어떻게 된 것이며 왜 저를 발견하고 도망치듯 이곳에 와서 숨어지내야하는지 왜 이야기하면 안되는지 조차도 제이슨은 아무것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여기가 고담의 크라임앨리라는 것도, 여기가 미래라는 것도 팀은 눈에 보이는 것들로 추측해낸 정도 였다. 제이슨은 아무것도, 하다 못해 제 이름 조차도 불러주지 않았다.
"왜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아?"
같이 생활하면서 서로를 불러야하는 일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제이슨은 야, 너 따위의 호칭을 쓰고 어떨 때는 부르는 것을 생략하기도 했다. 그럴 가능성이 매우 낮지만 때 마침 팀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던가 경우도 생각해보았지만, 팀이 생각하기에 제이슨은 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걸로 보였다. 대체 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그렇게 싫었나. 팀은 조금 서글퍼졌다. 스스로가 답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지금은 특수 상황이라 그렇다며 합리화 했다. 고담이라고는 하나 팀은 전혀 모르는 곳이나 다름 없었고 만난사람도 달리 의지할 사람도 제이슨 한 명 뿐이었으나까. 그의 행동에 이렇게나 휘둘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팀이 다니고 있는 마사 아카데미 근방에 있는 고담 아카데미에는 리처드 존 그레이슨, 딕 그레이슨이 재학 중에 있었다. 그리고 팀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그녀의 학교를 결정했다. 딕 그레이슨을 근거리에서 볼수 있을지도 모르는 학교. 근방이라곤 하나 학교와 학교사이가 그리 가까울리 없었지만, 그래도 팀은 그 가능성에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사실 같은 학교를 다닌다는 선택지도 있었으나 팀은 웨인재단에서 설립한 마사 아카데미로 선택했다. 단지 마사아카데미의 교복이 조금더 마음에 들었을 뿐이었다. 같은 학교에서 자신의 우상을 보는 것에 미련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팀은 교정을 걷다 살짝 멈추어 서서 펜스 너머로 보이는 고담 아카데미 학생들을 오래토록 지켜보다 자리를 뜨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그런 팀이 제이슨을 만난 것은, 그녀의 시선을 오해한 몇 몇의 고담 아카데미 학생을 쳐내는 것도 익숙해 질 무렵으로 학기도 중반으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실례."
서 있던 팀을 스쳐지나가면서 건낸 인사는 그리 무례하다고 볼 수는 없었으나, 서로에게 '평안하세요'라는 말을 건내던 일상에서 제이슨이 건낸 인사는 좀 특이한 편에 속했다. 팀은 반사적으로 '천만에요'라고 대답하면서도 뒤돌아서 자신을 지나쳐가는 이를 보았다. 긴 머리가 성큼성큼 멀어지는 걸음에 맞추어 나풀나풀 거렸다. 팀의 행동은 재발랐기에 그녀의 얼굴 한자락이라도 보는 것이 가능했으나 그 짧은 찰나로는 그녀가 누구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기억에 남는 것은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던 걸음거리와, 그에따나 나풀대던 길고 풍성하며 햇빛에 무엇보다 반짝이며 검은 머릿결. 그리고 무심하게 던져진 한마디에 목소리. 앞의 두 가지는 특정하기에는 너무 광범위했고 목소리는, 팀이 마사 아카데미에 재학하는 모든 이의 목소리를 아는 것은 아니었기에 특정하기 어려웠다. 물론 단시간내에 알아내는 것이 어렵다뿐, 시간을 들인다면 머잖아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팀의 생각대로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은 그리 오랜시간이 걸리는 것은 아니었다. 이름 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후원자가 누구이며 누군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은 또 누구인지. 성격은 어떠하며 어디를 자주 가는지 등. 그녀, 제이슨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정보도 제이슨에 대한 팀의 호기심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학생기록부에 끼워진 제이슨의 증명사진도 손에 넣었지만, 이런 정적인 사진으로는 만족하기 어려웠다. 팀은 제이슨의 사진을 지갑 속에 잘 갈무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후 수업시간까지는 아직 여유로웠으나 딱 맞춰서 도착하기보다 여유롭게 도착하는 것을 선호하는 팀은 슬슬 움직여야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펜스에 잠깐 시선을 주었다. 그러고보니 제이슨도 이렇게 교정이 내려다보이는 옥상을 좋아하던 모양이었는데, 그 사람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으려나. 학생기록부에 부착된 사진이 없어서 교무실에 불려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혹은-,
"거기 너."
팀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계단에서 내려와 복도로 들어섰을 즈음,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자리에 서서 돌아보니 거기에는 팀이 생각하고 있던 사람이 팀의 눈 앞에 서있었다. 혹시 텔레파시라도 통한걸까. 평소의 팀이라면 생각지도 않을 가능성을 팀은 떠올렸다. 물론 그러한 팀의 생각을 알리 없는 제이슨이 성큼성큼 걸어가 팀 앞에 섰다. 세상에,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리본이 비뚤어졌어."
제이슨이 손을 들어 팀의 리본을 잡았다. 리본 양 끝을 가볍게 당겨 풀었다. 그리고 다시금 리본을 매어 주었다. 조심스럽게 팀의 리본을 매주는 제이슨 덕분에 팀은 가까이서 제이슨의 얼굴을 감상할 수 있었다. 예쁘다. 이것이 팀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감탄이었다. 딕을 찬양할 때는 넘쳐나던 어휘력이 제이슨 앞에서는 영 빛을 발하지 못했다.
"-"
두근두근.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울리는 소리에 팀은 미처 제이슨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저 제게서 떨어져가는 제이슨이 안타까워 저도 모르게 제이슨의 팔을 쥐었다. 돌아서려던 차에 잡힌 제이슨이 팀을 돌아보았고 팀은 제 행동에 당황했다. 물론 이대로 보내고 싶지 않는 것은 맞지만 따로 변명거리를 생각해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황하던 팀은 눈 앞에 보이는 좋은 핑계거리를 보고 그것을 냉큼 집었다.
"선배님 리본, 풀리셨어요."
아, 그냥 둬도 되는데. 제이슨의 말을 뒤로하며 팀이 제이슨에게 한발짝 다가갔다. 제가 메드릴게요. 팀이 덥썩 다가오자 제이슨은 어색하고 불편한 모습을 감추지 않았으나, 팀은 다시 그를 가까이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