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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친구와, 옌.

쿠오니 2017. 6. 1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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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랑, 문을 여니 문 턱에 자리한 풍령이 외부 공기를 기분 좋게 반겼다. 마침 차를 우리던 옌이 손님인가 싶어 내다보니 그곳엔 얼마전에 사귄 자신의 친구가 떨떠름하게 서있었다. 얼떨떨한 감정이 여실히 들어나는 그의 표정은 이 방문이 그의 의지와는 관계 없어 보였다.

 "어서와요, 제이슨. 마침 차를 우리고 있었는데 함께 하시겠어요?"

그러거나 말거나, 옌은 싱냥한 웃음을 띄우며 제이슨에게 말을 건냈고, 제이슨이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그게 내가 '사야할 것'은 아니겠지? 설마요, 저는 제 친구에게 물건을 강매하는 취미는 없는 걸요.

"허, 그럼 친구가 아니었다면 강매하려고 했고?"

"…반드시 필요하다면요."

 예를 들어 생사나 생계에 관련된 부분 같은 경우 말이지요. 한시가 급박하잖아요? 옌의 말에도 미심쩍게 보던 제이슨은 곧 옌이 자리하고 있는 테이블 마주편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래서 우리던 차가 뭔데? 우롱차요. 옌은 그리 대답하며 빈 잔에 차를 따랐다. 뚜껑이 떨어지지 않게 끔 올린 손은 물론이요 한두번 한 솜씨가 오래된 숙련자의 모습과도 같았다. 옌은 차가 채워진 잔을 먼저 제이슨을 향해 밀었고, 또다른 빈잔을 꺼내어 차를 따랐다. 마침 두잔을 가지고 오고 싶었는데, 제이슨이 올 걸 알고 그랬나보네요. 목소리에는 즐거운 기색이 베여 있어저, 제이슨은 뚱하니 옌을 쳐다보다 말을 던졌다.

"꽤나 즐거워 보인다?"

"차 친구가 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니까요."

 좋아하는 친구와 좋아하는 시간을 보내는 건 정말로 행복하기 그지 없는 일인걸요. 그 목소리가 , 시선이 아득해서 제이슨은 머쓱히 말을 던졌다. 푸핫, 나 외에 친구가 없냐. 농담조로 던진 말이었으나, 가라앉는 옌의 표정을 보고서 지뢰를 밟았다는 느낌이 들어 제이슨이 얼굴을 쓸었다.

"친구는 있죠, 하지만 더이상 차를 같이 마셔줄 순 없나봐요."

 친구들이 좋아할만한 차도 가득 채워놨는데, 사람이 없네요. 쓸쓸한 표정의 옌의 모습에 제이슨은 어떻게든 화제를 돌려보고자 가게 주변을 살폈다. 동양과 서양의 분위기를 합친 묘한 분위기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신기한 모형의 판이었다.

"저건 뭐야?"

 제이슨의 질문에 옌이 고개를 돌려 확인하고는 대답했다. 점성도구예요. 옛 동양의 시대를 풍미했던 도구죠. 그것 말고도 점성도구라면 꽤나 많아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말이죠. 

"다룰 줄은 알고?"

 제이슨이 흥미가 돋아 가까이 다가가 보니 뿌옇게 먼지가 묻어 있었다. 오래된 티는 났지만 사용기색이 없어 옌을 향해 물으니 옌이 고개를 끄덕였다. 왠만한 점성술은 다 할줄 알아요.  거북의 등껍질을 태워보는  방법도 아는 걸요. 옌의 대답에 제이슨이 질린 표정으로 옌을 쳐다보았다. 그 방법은 아주 오래된 것이니 질리기도 했고, 그것은 일단 동물을 죽여야 얻을 수 있는 것이었기에 쉽게 넘기기 어려웠다.

"그걸로 보는 게 가능해? 요즘 점들은 하나같이 두루뭉술하기만 하던데,"

 제이슨이 점술에 대한 불신을 표했고, 옌은 차를 한모금 홀짝이더니 대답했다. 두루뭉술한 것 만큼 정확한 점도 없어요 제이슨, 특히 미래 예지 같은건 말이죠.

 "사람의 일생을 길게 뻗어가는 반직선으로 볼 때, 과거는 지나온 행적이니 명확할 수 밖에 없지만. 미래는 어느 점으로 이어갈 지 모르기 때문에 무수한 가능성이 있죠. 그 수많은 무수한 가능성중에 하나를 정확히 집어내는 것은 불가능해요."

 한 점성술사가 한 점을 명확히 파악해 읊어드린다고 해도 내담자가 다른 길로 갈 수도 있고,  좋지 않은 결말이라고 한들 너무 명확한 바람에 내담자는 다른 길은 보지도 못하고 그 길로 들어설 수도 있죠. 그러니 예지 중에서도 미래 예지는 좀더 예민한 소재예요. 그나마 정확한 미래 예지를 원한다면 좀더 가까운 시기의 것을 요구하는게 좋아요. 예를 들어, 오늘 저녁은 무엇일까하는 정도? 그마저도 여러선택이 있으니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죠.

 사실 술사들이 하는 예지는 상당한 패널티를 가지고 있어요, 그 사람의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그것을 엿보는 것은 천륜에 어긋나는 일이니까. 그래서 점을 보기 위해선 합당한 대가가 있어야하는 거죠. 복채라는 개념은 바로 그런 거예요. 요즘은 술사들이 많긴하지만, 그들이 전부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를 일이요. 하지만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그 예지가 아주 무근거하지 않기 때문이고.

"제이슨, 예지에 관심이 있나요?"

 옌의 질문에 제이슨이 고개를 저었다. 관심이 있는건 아니지만, 어딘가 초자연적 힘이 존재한다는 건 알아. 그래서 물어본거고. 제이슨의 질문에 옌이 푸스스 웃으며 말했다. 점성 도구에 쓰이는 이들은 평범한 것들이 아니예요. 그들 스스로 마력을 가지고 있는 거죠. 제이슨이 보고 있는 그 판에는 팔괘가 세겨져 있을 거예요. 음양오행에 대해서는 제이슨도 들어본적이 있죠?

 옌의 설명에 제이슨이 판을 좀더 훑어보다가 이내 흥미를 잃고 자리로 돌아왔다.  제이슨이 판을 보느라 시간을 쓴 만큼 잔 안의 차는 식어 있었다. 제이슨이 그것을 다시 입에 대었고 생각보다 식지 않음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차는 따뜻한 편이 맛있으니까요. 마치 제이슨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듯 돌아오는 대답에 제이슨이 눈을 부릅 떴다. 그러나 옌은 예의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저는 예지를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것이 상대의 삶을 묶을 수도 있고 어쩌면 누군가에게 건드려지고 싶지 않은 부분도 있고 또 어떤것은 말 못할 이야기라 조용히 안고 있어야하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잠깐 정도는 봐줄 수 있어요. 당신이 나와 차를 마셔준 답례로. 당신은 신뢰를 얻고 나는 당신이 베풀어준 호의에 답하는 거죠. 원하시나요?

 옌이 제이슨을 향해 물었고, 제이슨은 침묵 끝에 손을 내밀었다. 옌은 제이슨의 손금을 천천히 쓸더니 입을 열었다. 화마에 당할 상이네요, 아니 이미 한번 삼켜졌군요. 그리고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해 살아났고-…. 옌은 조용히 제이슨의 과거를 살피더니 입을 다물었다.

 "당신에게 생명과 죽음이 공존하고 있군요. 당신은 언제나 죽을 위기해 처하기도 하고 언제든 살아날 구멍이 생겨요. 커다란 섭리의 작용. 그것 외에는 따로 설명할 길이 없군요. 구구절절하게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간단히 말해. 악운이 강한 타입이시네요."

 옌은 그것을 끝으로 제이슨을 향에 제이슨의 손을 밀었다. 큰 힘이 아니었던 터라, 제이슨이 손을 거둬갔고, 옌이 싱긋 웃었다. 제이슨은 제 손을 쥐었다 움켜쥐었다.  죽었다 살아났으며, 그 죽음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잘 몰랐다. 배트 패밀리를 제외하고서, 겨우 몇번 만났을 그녀가 그것은 그것을 알길이 없었고 그것만으로 충분히 증명이 되었다. 

 다만 제이슨의 비밀을 알고있는 만큼 그녀는 경계 대상이었다, 그리고 생각보다도 지혜로운 그녀가 그것을 모르는 바도 아닐테고 굳이 입을 떼었다는 것은 제이슨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서라 짐작했다. 이어진 말들은 아마도 제이슨에 대한 미래를 두루뭉술하게 언급 했던 것이겠지. 다시 되돌아보면 그녀의 말 마따나 죽을 기회도 많았고 살아날 구멍도 많았다. 정말로, 악운에는 강했다.

 탁, 제이슨은 잔에 담겨져 있던 차를 비우고 일어섰다. 그러는 중에 옌을 흘깃 보았으나 옌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가게 문을 열자 또다시 풍령이 춤주며 외부공기를 반겼고 제이슨은 옌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그자리에 앉아 있는 옌을, 제이슨은 빤히 보다가, 입을 뗐다.

"다음에 보자."

 그 한마디가 어찌나 껄끄러웠던지 제이슨은 말하고 나서 가게를 바로 나왔으나, 삐그덕하고 누군가 크게 움직이는 소리를 놓지진 않았다. 다행이 풀죽지 않아 다행이네-라고 생각하다 문득 왜 자신이 그녀의 기분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 여자가 나와 무슨 상관이람. 저를 가족이라고 보는 배트패밀리에도 신경을 안쓰는데-아주 안쓰는 건 아니었지만- 그깟 친구가 뭐라고. 그깟 친구가 뭐라고, 제이슨은 옌을 신경쓰고 있었다. 친구니까.

 아무리봐도 자신이 손해인거 같은데, 그리 생각하면서도 제이슨은 이 인연을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다음에는 숨막힐 정도로 향이 피워진 가게가 아니라 밖에서 봤으면 하고 다시 만날 날을 기대했다. Because, she is his fri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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