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담의 황태자'라고 불리는 브루스 웨인의 이면의 모습이 '배트맨'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헤드셋은 모니터에 비춰진 브루스 웨인과 자신의 옆에서 컴퓨터를 다루고 있는 배트맨을 번갈아 살피며 비음을 내었다. 흐응. 알고는 있었지만, 모니터 너머와 지금 옆에선 남자는 차이가 컸다. 아니, 다른 인물이긴 하지. 모니터에 비춰진 '브루스 웨인'과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배트맨'은 다른 우주의 사람이니까. 그래도-… 설마하니, 다른 우주에까지 출장임무라니 말이야, 오래살고 볼 일이지.
평행 우주에까지 건너와야 했던 이유는 이곳에 존재하는 '저스티스 로드'라는 단체 때문이었다. 물론, 헤드셋이 있던 곳에도 그와 비슷한 단체가 있었다. 성격은 전혀 다르지만. 장거리 출장은 그리 반기는 편은 아니지만, 이번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상당히 좋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배트맨과 함께이니까. 뭐어, 잠입임무라는 것은 달갑지 않지만 그녀가 상대하는 상대 또한 브루스 웨인이었다. 함께온 다른이들 보다도 접점이 적다는 것이 제일 큰 이유였다. 당연한 소리랄지, 그녀가 고담에 오지 않았다면 배트맨에게 사로 잡힐 일도 없을 것이었으니까. 또한, 여러가지 것들을 섭렵한 그녀라면 사교파티에서도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을 터였다.
"…듣고 있나?"
"그럼요, 배트맨."
자신에 대해 냉정히 설명하고 있던 배트맨은 헤드셋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아무래도 그녀의 태도가 흘려듣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허나, 그럴 일은 없었다. 다른이도 아니고 배트맨의 말을 듣지 않을리가. 다른 누구보다도 선명히 들려오는 목소리가 그의 목소리였다. 심지어 모니터 너머의 브루스 웨인보다도. 배트맨은 썩 믿지 않는 모양새였으나, 상관없었다. 증명하면 되니까. 배트맨에겐 무른 그녀라도 임무에는 힘을 빼는 일이 없었다. 헤드셋은 다시 배트맨에게서 눈을 떼어 모니터를 보았다. 여성을 향해 웃는 가면이 썩 잘어울리는 남자가 거기에 있었다.
[준비는 됬나.]
"물론이죠."
장착한 이어셋 넘어로 배트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의 임무복장은 검은색 이브닝 드레스에 검은 하이힐. 어깨가 훤히 들어나 저녁에는 조금 추울수도 있겠으나 그녀의 어깨는 움츠러듬 없이 당당했다. 잘 위조되어진 초대장을 쥐고서 저택에 들어섰다.
"어서오십시오, 실례지만 초대장을 확인해봐도 되겠습니까?"
정문에 들어서자 노집사가 깍듯이 인사를 하며 초대장의 여부를 물었다. 헤드셋은 손목을 까딱 젖혀 노집사에게 초대장을 내밀었고 검지와 중지 사이에 빳빳히 선 초대장을 받아든 노집사가 내용을 확인후 고개를 다시금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부디 즐거운 파티 되시길.
커다란 홀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솔직히 북적이는 감도 없잖아 있었지만.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듯 조용히 잠입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많은편이 좋았다. 그리고 원래 주인공은 늦게 등장하는 법이잖아? 이번 임무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이 자신이었다. 보란듯이 완벽히 성공해서 그가 다시금 반하게 만들 생각을 하니 상당히 즐거웠다.
성큼성큼 홀안으로 들어가면서도 우아하게, 찬찬히 훑으면서도 무심하게 들어오던 헤드셋은 곧 타겟을 찾았다. 그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다른 여성과 웃으며 대화하고 있었다. 우리 브루스가 잘생기긴 했지. 새삼 깨닫는 그의 외모에 어쩐지 자신의 콧대가 으쓱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런 곳에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었군요."
잘감겨 들어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브루스 웨인이 미소를 띤 채로 헤드셋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이것이 사교계의 브루스, '브루시'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시크릿아이덴티티를 아는 헤드셋으로서는 영 보기 힘든 표정이었도, 적응이 안된 얼굴이기도 했지만. 그녀도 산전수전을 겪은 몸, 내색하지 않고 새치름히 말했다.
"오 이런 미스터 웨인. 저는 연약한 꽃에 비유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하하. 이것 참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꽃이 다 연약하고 가려리기만 한 것은 아니지요. 여기 꽃들의 왕이라고 불리는 모란은 어떻습니까?"
마침 근처에 있던 꽃병에서 꽃 한송이를 꺼내 내밀었다. 탐스럽고 커다란 붉은 꽃이 헤드셋의 손위에 살포시 올려졌다. 붉은 빛이 레이디와 아주 잘 어울리는 군요. 브루스의 허울 좋은 칭찬에 헤드셋이 살짝 눈웃음 치며 답했다. 나쁘진 않네요.
"모란의 꽃말은 부귀와, 영화. 당신에게 아주 잘 어울릴 것 같군요, 레이디…"
"헤드셋."
"레이디 헤드셋, 저와 한곡 하시겠습니까?"
'브루스 웨인'이 헤드셋을 향해 손을 내밀었고, 헤드셋은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의 큼지막한 손 위로 헤드셋의 손이 올라왔고, 때 마침 홀을 채우던 연주가 바뀌었다. 오, 이런. 악단들도 당신의 춤이 기대가 되는가 봅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할지 딱 좋은 타이밍에 연주가 바뀐 것을 브루스가 센스있게 말을 던졌다. 흐르는 음악이 어떤 음악이건 자신있는 헤드셋이었지만, 흐르는 음악은 왈츠였다. 분위기를 타기엔 이만한 곡도 없지. 브루스의 에스코트를 받아 홀로 나왔다.
춤을 추기위해 홀로 나온것은 비단 브루스와 헤드셋뿐만은 아니었으나, 헤드셋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오직 브루스였다. 나한텐 '배트맨' 뿐인데 말이지. 손을 잡지 않은 브루스의 빈 손이 헤드셋의 허리를 감쌌고, 헤드셋의 손은 브루스의 어깨에 올려졌다.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동시에 시작한 스텝. 원래 상대방의 움직임에 맞추어 추는 게 왈츠였으나 두사람이 추는 춤은 누구에게 맞추었다고 보기 힘들었다. 다시 말하면 굉장히 호흡이 잘 맞았다.
"왈츠가 제법 익숙하시군요. 레이디."
"미스터 브루스도 마찬가지신걸요."
"저야 기본적으로 배우는 데다, 많은 레이디와 호흡을 맞추어 왔으니 익숙한 것도 당연하겠지요, 혹 레이디께서도 그렇습니까?"
"그러하다하면?"
"이제껏 레이디와 춘 상대랄 질투하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춤이란 것은 무릇, 추면 출 수록 익숙하게 되는 것이지요."
"흠, 명확한 대답은 아니군요."
"미스터의 대답이 그리하였으니까요."
'모르겠다'는 대답은 그리 될수도 그리 아니될 수도 있다는 여지를 두고 있으니, 저도 그리 대답하였던 것 뿐이랍니다. 저만 다 알려주기에는 불공평하잖아요? 그리고 저는 그런 것을 몹시 싫어하거든요. 헤드셋의 말에 살짝 놀란 표정을 짓다가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거 레이디에게 한방 먹었군요. 그래서 싫으신가요? 아니요, 오히려 함께 했을 당신의 파트너에게 질투가 나는군요.
"어머나."
"하지만 저도 지는 것은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부디 레이디의 마음에도 제가 마음에 드셨길 바랍니다. 연주가 멈추고 춤아 끝나자 헤드셋이 올려진 손을 들어 올려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러면서도 헤드셋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그의 시선이 집요해서, 솔직히 반 정도 설렜다. 아마 헤드셋과 그에게로 밀려오는 여성 무리들이 아니었다면. 크나큰 미스를 치뤘을지도 몰랐다.
'브루시'가 수 많은 여성들을 상대하는 사이, 헤드셋은 바깥공기를 맡을 겸 사랑스런 이의 목소리를 들을 겸 테라스로 나갔다. 찬 밤바람은 훤히 들어난 헤드셋의 어깨를 스쳤다. 감기 걸리기 딱 좋은 바람이었으나, 홀 안의 후덥지근함에 비한다면 이 편이 훨씬더 좋았다.
I tried be perfect
But nothing was worth it
I don't believe it makes me real
I though it'd be easy
But no one belives me
I meant all the things I said
읊조리듯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으니 이어셋 넘어로 숨소리가 들려왔다. 무어라 말할것 같아 잔뜩 설레어 귀 귀울이고 있을때, 달갑지 않은 한마디가 들려왔다.
"여기에 있었군요, 레이디."
브루스 웨인이었다. 내가 원하던건 다른 당신이지 당신이 어니었는데. 그리 생각하면서도 내색 않고 헤드셋이 물었다. 저를 찾고 있으셨나요, 미스터? 파티에 가장 화려한 꽃이 보이지 않기에 찾고 있었던 참입니다. 흐응. 헤드셋은 브루스의 대답에 비음을 내며 추임새를 넣었다.
"한가지, 질문이 있는데 대답해주시겠어요 미스터?"
"아리따운 레이디께서 물으신다면 무엇인들."
여러가지 생각을 해봤어요, 당신의 성격이나, 저의 위치. 다른 초대객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다 넣어서요. 그런데도 이유를 모르겠어서 당신께 묻는 거예요. Why are you so kind of me, Mr?
"Well,"
브루스가 말 끝을 흐렸다. 영민한 사랍답게 헤드셋이 묻는 것이 액면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리고 대답을 고르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녀의 감은 '브루스'가 무언가 눈치챘노라고 이야기 하고 있었다.
"레이디에게 관심이 있기때문에-라는 것은 레이디가 원하는 대답이 아닐것이고.,"
브루스는 테라스 반대편의 파티회장을 슬쩍 보더니 커튼을 치고 테라스 묻을 닫았다. 여전히 달빛이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지만, 회장 안의 환한 조명이 차단 된 만큼 그리 밝지는 않았다. 헤드셋은 언제든 드레스 안에 갈무리해둔 총을 사용할 수 있게끔 준비했다. 브루스는 더이상 진중한 눈빛, 그러니까 파티회장의 브루시보다도 배트맨에 가까운 표정을 지으며 운을 띄웠다.
"레이디께서도 로드에 대해서는 익히 아실 겁니다."
"어느정도는요."
세간에 관심을 가져도 전 세계적인 일을 다 알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헤드셋은 말을 덧대며 말했다. 기관을 이용하면 전세계 일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진 않지만, 헤드셋은 굳이 자기 우주도 아닌 이곳의 일에 대해 자세히 알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고, 이것은 어찌되었든 거짓말은 아니었다.
"레이디께서는 범죄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미스터께서 말씀하시는 게 단순히 법을 어기고 죄를 지은 사람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범죄를 저지르고도 죄를 뉘우치지 않고 상습적으로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네요."
브루스가 하고자 하는 말을 헤드셋이 모를리가 없었다. 그러나 요지를 이해못하는 척 모르쇠를 떼고 있자 브루스가 침음성을 냈다. 음, 레이디께서도 이 말은 들어보셨을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거짓은, 더 큰 거짓을 만든다."
죄질이 무겁든 가볒든, 그것을 어긴사람은 미래에 더 크고 무거운 은 범죄를 저지를 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로드께서는 그 점을 걱정하고 계신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런 로드께서도 직접 루터를 해하셨죠. 무릇 모든 일에는 그 대가가 따르는 법, 로드께서 직접 그 대가를 지신거지요.
"하면, 미스터께서는 로드를 지지하고 계신건가요? 제가 듣기로는 그렇게 들리는데."
"레이디께서는 로드가 잘못됬다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글쎄요, 이렇다하기 힘든 대답이네요."
헤드셋은 말을 아꼈다. 정의를 지키기 위해 다른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은 헤드셋이 했던 요원 임무와 다를 것이 없었고 그랬기 때문에, 불살주의인 배트맨과 대립하기도 했다. 뜻이 맞아 함께하고 있긴하지만 다음 임무 때는 그를 향해 총구를 겨누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렴 그녀의 '배트맨'이 그것하나 못피하겠냐만은.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같은 브루스임에도 불구하고 헤드셋은 이 남자에게 끌리지 않았다. 물론 혹할 외모나 실력은 같은 것이었다. 그 고집쟁이 같은 성격도. 그러면 무엇이 다른 것일까. 단순히 다른 우주의 그라서? 잠깐의 생각 끝에 헤드셋은 하나의 결론에 다달았다. 그리고는 어여쁜 미소를 지으며 '브루스'를 향해 대답했다.
"다만, 한가지 제가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는 게 있군요."
"그것이 무엇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Wht not?"
"레이디께서 괜찮으시다니 꼭 듣고 싶군요."
"제가 대답해 드릴 수 있는 것은 한가지예요. 미스터-, 당신은 그곳에 어울리지 않아요."
"그곳이라니요?"
"이런, 이제 미스터께서 모른척 하시는 건가요?"
헤드셋이 웃었다. 배트맨으로 부터 퇴각하라는 명령도 떨어졌겠다. 헤드셋은 더이상 숨기지 않기로 했다. 저스티스 로드요. 당신에겐 어울리지 않아요, 배트맨. 헤드셋이 그것을 입에 담자 브루스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아무래도 레이디와는 풀어야 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군요."
"저도 미스터께 묻고 싶은건 많지만 애석하게도, 이제 가봐야할 시간이라서요."
그렇게 말하며 헤드셋은 슬금슬금 뒷걸음쳐서 테라스의 끝에 섰다. 찰칵, 하고 안전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브루스 웨인이 총을 사용할 리가 없으니, 아마도 그림자 속에 숨겨져 있을 사람의 것이었다.
"이런, 저는 레이디와 이야기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산더미라서 말입니다. 조금더 곁에 있어주지 않겠습니까."
"그런 간곡한 청에, 쇠붙이는 좀 아닌거 같은데요."
저벅저벅 걸음 소리가 들리며 그림자 안에서 누군가 모습을 들어냈다. 헤드셋의 또래로 보이는 청년이 눈하나 깜박하지 않고 헤드셋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태여 브루스가 누구라고 소개하지 않았지만, 헤드셋은 직감적으로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었다. 아니, 이 우주의 자신이었다.
"부디 이렇게라도 레이디와 같이 있고 싶어하는 저를 이해해주시길."
"…"
누가봐도 불리한 상황에서 헤드셋은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렸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러셔도 저는 그만 돌아가야할 시간이네요.
"즐거웠어요, 브루스 웨인. 그리고 헤드셋."
헤드셋의 그 한마디가 꿑나자 마자, 허리를 낚아 채는 단단한 팔을 헤드셋은 말없이 받아들였다. 두어번의 공중에 뜬 것을 끝으로 허리를 잡았던 손길이 풀렸고 헤드셋은 익숙하게 한 건물에 착지했다. 그리고 그와 같이 착지한 검은 그림자를 향해 즐거웃듯이 말을 건냈다.
"설마, 당신이 저를 데리러 올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배트맨."
"…즐거워 보이더군."
헤드셋의 말을 검은 그림자, 배트맨이 동문서답으로 대답했다. 임무를 즐긴 것이 불만이었는지 아니면 다른것인지. 어쨌거나 나쁜 기분은 아니었기에 유들하게 헤드셋이 대답했다. 네에, 꽤 즐거웠어요. 제가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브루스 웨인과 춤을 춰보겠어요? 헤드셋의 대답에 배트맨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대로 상황에 따라 아군이 되는 편이긴 하지만, 불살주의인 배트맨이 살인도 불사하는 헤드셋과는 꾸준한 갈등을 빚고 있으니까.
"-한곡 하겠나?"
묘한 씁쓸함을 삼키는 헤드셋에게 검은 손에 내밀어졌다. 이것이 어떤의미 인지, 알고는 있었으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헤드셋이 배트맨을 쳐다보았고, 배트맨이 대답했다.
"자네의 말대로, 이럴때 아니면 언제 요원과 춤을 추겠나?"
"리그 맴버들이 가만 두지 않을 텐데요?"
손을 조심히 잡으면서도 헤드셋이 대답했고, 자연스럽게 헤드셋의 허리를 잡은 배트맨이 대답했다, 그건 그때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