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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컾이지만 약간의 딕슨 풍이 있을수 있습니다.
*슨이 생일 축하용 연성, 생일 축하한다 제이슨 토드!!!
*20,098/15,263
제이슨은 제 앞에 놓인 차를 마시는 척 제 앞에 앉은 두 남자를 살폈다. 제 또래, 혹 그 이상으로 보이는 두 남자는 서로 다른 이미지를 가지면서도 미형의 얼굴을 지닌 이들이었다. 왼편에 앉은, 저를 데미안 웨인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큰 키에 근육으로 채웠을 것 같은 다부진 몸을 가지고 있었으며 제 짧은 머리를 바짝 세워 맵시를 내었다. 그을린 듯한 어두운 피부에 보석같이 빛나는 녹색 눈동자, 굵은 눈썹. 강직해보이는 그는 제이슨에게 확연히 호의를 품고 있었다. 오른쪽의 남자를 보자면 팀 웨인(혹은 티모시 웨인)이라 소개했으며 비교적 얇은 느낌을 주었다. 그럼에도 웨인의 특성상 빽빽히 근육으로 채워있겠지. 데미안과는 대조적으로 흰 피부에 머리를 아래로 내려 부드러운 인상을 주었다. 또 새 파랗게 빛나는 푸른 눈은 역시 제이슨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리고 아주 유감스럽게도 제이슨은 두 사람의 이름과 같은 이들을 알고 있었다. 둘 다 제이슨보다 훨씬 어린 놈들인게 문제지.
그래서 제이슨은 이곳이 평행 우주, 그것도 나이가 반전되어 있는 곳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그럴 수 밖에 없기도 했다. 웨인저택에서 깨어난 데다가 얼굴이 알려진 팀 웨인이면 몰라도 데미안 웨인마저 흉내낼 수 없을 것이다. 거기에 유능한 집사 알프레드가 그 곁에 시립해 있으니 확실했다. 그렇담.... 제 무릎 위에 올라 발을 동당 거리는 이 집의 막내가 딕 그레이슨이라는 거겠지. 떨떠름함에 아이를 내려다보면, 시선을 느낀 것인지 정면을 보던 아이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고 방긋 웃었다.
"리처드-, 제이슨을 곤란하게 하지말고 내려와."
"헉! 제이형 내가 불편해?"
제이슨의 불편함을 알아챈 데미안이 딕을 타일렀다. 그 '데미안'이 저를 신경쓴다는 것도 놀라운데, 아이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옷자락까지 붙잡고 올망올망 바라보는 얼굴에 마음이 약해졌다. 따지고 보면, 아이가 불편하기보다 아이와 닮은 얼굴인 '딕 그레이슨'이 걸릴 뿐이었다. 그래, 닮은게 어디 아이 탓인가 디키놈 탓이지. 그렇게 결론을 내리며 아이의 머릴 쓰다듬었다. 아냐, 괜찮아. 제이슨의 말에 얼굴 가득히 기쁨을 담아내며 안겨들었다. 제이형...!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이 찰싹 붙어온 딕은 데미안을 향해 혀를 내밀어 보인 뒤 다시 그 얼굴을 제이슨의 품에 묻었다. 아무일 없다는 듯이 시침을 뚝 떼며 있는 것이 제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거려나.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데미안이 기가 막힌 듯 혀를 찼다.
"그래, 네가 리처드의 약은 수에 넘어간 게 한두번이 아니었었지. 너무 받아주지 마, 그러다 버릇 나빠져."
"그걸 네가 할 입장은 아니라고 봐."
제이의 뻔한 수작에도 넘어가주는 네가 딕의 어리광을 받아주지 말할 처지는 아니지. 아니, 조르지도 못하던 애가 되도 않는 머리 쓰는데 어떻게 그냥 둬? 거기에 나만 그래? 아버지도 그렇게 한다고. 팀의 첨언에 데미안이 억울한 듯 말했다. 그래, 내가 무슨 말을 해주길 바라? 아버지나 아들이나 똑같다? 드레이크-. 싸우잔 말은 아니야, 처음보는 동생 앞에서 그런 꼴을 보일 순 없지. 그러니까, 내 말은. 구슬리는 편이 좋다는거지.
"기본적으로 제이슨은 어린 아이에게 약하잖아."
딕 뿐만이 아니라. '어린 아이'에 교묘하게 힘을 실은 팀의 말에 제게 달라붙은 딕이 제이슨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정말이야? 아니지? 하고 묻고 싶은 얼굴. 어려서 그런지 그 속이 훤이 들여다보였다. ...어, 그래도 나한테 이렇게 들러붙는 건 너밖에 없어. 제 세계의 어린 데미안이 이럴 일은 없었고, 어린 팀도 그러지 않는 편이니 어린 딕이 유일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원하는 대답까진 아니었는지 쉽게 떨어져 나갔다. 딕? 그게 좀 서운해 부르면 데미안이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놔둬, 사춘기라 저래.
"예상했다시피 평행 우주 중 하나야, 리처드를 꽤 껄끄러워 하는게 네가 있던 곳에선 리처드가 맏이였나보지? 그런가 하면 알프레드는 그러지 않는 걸 보아 나이대가 바뀐 것은 우리 뿐이고."
"그렇담, 지금 제이가 마주하고 있는건 어린 우리가 되겠네. 낯설어 울고 있진 않을지"
하? 걔가 어떤 앤데 그까짓 거에 울겠어? 로빈이 되기위한 훈련에도 꾹 첨고 버텼던 애야. 그애가 네 앞에서 울지 않은 건, 네가 항상 놀려대니 그런거잖아. 아닌 척해도 그 애가 얼마나 우릴 의지하고 있는지 너도 모르진 않잖아. 물론 그곳에 어른인 딕이 제이를 달래주겠지만 제이에게 있어 '딕'은 돌봐줘야할 동생이야. '딕'에게 온전히 의지할 수 있을까?
"그건 문제 없을걸?"
"확신해?"
제이슨이 던진 한마디에 데미안의 매서운 눈초리가 꽂힌다. 여기의 제이슨 토드는 어지간히 사랑받고 있나보네. ...솔직히 말을 꺼낸 지금도 내가 왜 디키버드 따위의 변호를 해야하는지 모르겠는데, 걘 사람의 벽을 허무는 재주가 있어. 하물며 상대는 어린 애지. 날선 반응을 할 이유가 어디에도 없잖아. 거기에 놈은 이미 '제이슨 토드'를 겪었어, 팀 드레이크를 거쳐 지금은 데미안 웨인을 겪고 있지. 형을 따르는 순한 애야 금방 녹일거다. ...리처드를 마뜩찮아 하는 것 치고 꽤 그를 신뢰하고 있군? 뭐, 좋고 싫고를 떠나 실력은 확실하니까. 놈은 완벽한 로빈이고, 골든보이니까. 솔직히 싫어할 놈을 찾는게 더 드물어. 제이슨의 변호가 먹혔는지 팀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본인이 그렇게까지 확신하니. 우리도 더 걱정은 하지 않을게.
"그래, 그거. 너네 어째서 내가 제이슨이라고 확신하는 건데? 내가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확인하기까지 온전히 믿지않는게 너네 신조 아니었냐?"
"그거야, 우리 둘을 보고 초면에 '미친' 같은 단어를 쓸 사람은 제이슨 밖에 없으니까."
데미안은 저렇게 보여도 그 브루스 웨인의 후계자고, 나는 그 기업의 사장인데다. 데미안의 무의식적인 기백에 눌리는 사람이 많거든. 그런 우리를 보고서 그런 말을 뱉을 수 있는 건 제이슨 정도야, 실제로 욕하기도 했고. ...어, 그래. 친절한 설명 고맙다. 이곳의 제이슨 역시 그와 같이 걸은 입을 가진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런 일로 확신을 얻었다는 걸 생각하면 수고가 줄었다고 좋아해야하는 건지 아닌지.
"그레이슨? 토드를 데리러간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그 다리에 붙은 그건 뭐지?"
지난 밤의 일로 웨인저택에 머물렀던 제이슨을 깨우러 갔던 딕이 어린 아이를 달고 돌아온 것에 데미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사나운 눈길이 어딘가 낯이 익은 거 같긴 한데, 영 기억이 없는 얼굴이라 더 못마땅했다. 제가 한 번 본 얼굴울 잊었다고? 그럴리가. 물론 가치 없는 이들이야 잊을 수도 있겠지만, 그레이슨이 저택에 데리고 올 정도라면 잊을 리가 없었다. 데미안의 질문에 딕은 난감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문을 열었다.
"어... 그게 말이지 리틀디? 놀라지 말고 들어, 이 아이가 제이야."
"허?"
네 눈이 장식이 아니길 바라, 그레이슨. 그게 어떻게 토드라는 거야? 그치만 제이의 방에 있었는 걸? 누가 악의를 가지고 바꾼 것일 수도 있잖아. 굳이 제이를? 만약 그랬다면 제이가 가만히 있었을까? 그 소란 중에 우리 중 누구도 깨닫지 못할 확률은? 거기에 누군가와 다툰 흔적은 커녕 출입한 흔적도 없어. 배트 케이브만큼의 시설은 없지만 저택 역시 많은 방범 장치들이 있고 그걸 모두 뚫고 제이슨과 바꾼다? 본인은 둘째치고 아이까지 그 장치를 회피하는 게 가능할까? 그건-…
리틀 디. 네가 믿기 어려워하는 건 알아. 하루 아침에 사람이 어려진다니 많은 경험을 한 너라도 받아들이기 힘들겠지. 하지만 나도 그리 녹록치 않은 사람이란 걸 잊지 않았길 바라. 이미 가능한 가정은 전부 다 했고 그럼에도 나온 결론이야. 그리고 이 아이 제이슨의 어릴 적과 똑같아, 내가 어떻게 이 시절의 제이슨을 착각하겠어?
"거기에 놀라긴 아직 일러. 제이슨? 이 두 사람에게 네 소개를 해주지 않을래?"
딕이 상냥한 낯으로 아이에게 말을 걸면 다리에 달라붙어 둘을 경계하던 아이가 조금 떨어져 정중하게 인사했다. 제이슨…웨인 입니다. 아이의 움직임은 썩 어색하긴 했지만 배운 태가 나, 교육을 받은 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가 입에 담은 '웨인'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들이 아는 제이슨 토드는 배트맨 패밀리에 얽매이긴 했으나 자신을 스스로 웨인이라고 소개하는 일은 없었다. 한 때 입양 건이 진행되긴 하였으나 그는 여전히 토드였다. 그러니까 그건 딕으로써도 어색한 이름인 것이다.
"이 애의 이름은 제이슨 토드-웨인.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 아이는 온전히 입양 수속을 끝까지 밟았다는 거야. 제이랑은 다르게 말이지."
제이슨은 위로는 두명의, 아래로는 동생이 하나 있대. 물론 첫째를 제외한 셋은 전부 입양아고 제이슨은 두번째로 입양되었다고 했어. 그리고 동생의 이름이 딕 그레이슨이라더라, 정말 놀랐지 뭐야! 그럼 두 형의 이름은 뭘까? 한번 맞춰볼래? 딕이 방긋방긋 웃으며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았고 말을 잃어 입을 다문 데미안과는 달리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짚으면서도 팀이 손을 들어올렸다. 대답보다는 질문을 위한 것이었지만 어짜피 대답도 되니 상관없었다. 그래, 팀. 네가 말해봐.
"그러니까 딕, 네 말은 이 아이의 형이 데미안과 나-…란 거지?"
"맞아. 정확히 데미안 웨인과 티모시 웨인이지. 둘다 서롤 이름으로 부른대, 누구들과는 다르게."
제이슨은 분명 형들에게 의지하고 싶을 텐데, 두 형들이 그렇게 경계만 해선 안심하기 힘들겠지? 설마, 그 아일 나와 이 사이코패스에게 맡긴다는 건 아니지? 딕? 오 물론 아니지. 난 너희 형이고, 제이의 형이잖아. 어떻게 곤란하게 두겠어. 다만 제이슨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달란 거야. 얼마나 걸릴진 모르겠지만 잘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지? 우리의 제이를 돌려받기 위해서도. 딕의 말에 팀이 한숨을 내쉬면서도 아이를 살폈다. 인사를 한 뒤 다시 딕의 다리에 찰싹 붙은 아이는 이제 경계의 빛보다는 호기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 아이에게 무슨 잘못이 있나. 팀은 아이에게 살가운 낯을 내밀며 인사했다.
"안녕 제이슨? 난 팀 웨인이야."
"팀…형?"
아이의 이어진 말은 좀 충격이 컸지만. 제가 아는 제이슨이라면 팀이 아무리 연상이라고 할지라도 형이라고 하진 않을텐데. 딕에게도 꼬박꼬박 삿대질을 하는 그가 얌전히 형이라고 부르다니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러나 올라간 눈초리를 보면 그는 분명 제이슨이 맞았다. 순서가 다르다고 이렇게나 다를 일인가. 팀의 이름을 입에 담은 아이는 딕과 눈을 맞추었다. 가볼래? 딕이 선선히 보내주면 이제 팀에게 착 붙었다.
"아무래도 형이랑 있는 게 마음이 편한 모양이야."
딕이랑 있음에도 쭈뼛쭈뼛한 구석이 있던 아이는 팀에게 붙자 그 어깨에 힘이 살짝 빠졌다. 딕이 아무리 잘 대해준다고 하나 어렸던 동생이 큰 형이 된 것이 못내 어색했으리라. 그에 반해 팀은 그보다는 어렸으나 연령의 폭이 두 사람보다는 좁으니 편했겠지. 아이의 발육상태로 본다면 어쩌면 팀이 지금의 제이슨보다는 연상일 수도 있으리라.
"아, 왔어요 브루스?"
문득 느껴진 인기척에 뒤돌아 본 딕이 먼저 아는 체하면 브루스가 어색하게 손을 들었다. 그래. 다들 잘 잤니? 제이슨은-…오 이런. 제 아이들을 제일 덩치가 클 아이가 보이지 않아 결국 돌아간 것일까, 아쉬움을 삼키며 아이들을 훑어보던 그는 팀의 품의 아이를 보고 탄식했다. 와, 브루스는 그대로네. 다행이 브루스까진 변하지 않았는지 탄성을 뱉는 제이슨에 데미안이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쳤다.
"흥, 거기나 여기나 네명이나 되니 당연하지."
어떻게 어린 제이슨에게도 말하는 말투가 그런지 팀이 고깝게 그를 흘겨보면 그 품안의 제이슨이 중얼 거렸다. …데미안의 성질 머리도 그대로고. 가까이 있어 그 말을 전부 들은 팀이 튀어나가는 실소를 애써 다잡고 있으면 옆에서 딕이 뒤돌아 웃고 있었다. 누군 참고 있는데. 못마땅해 딕을 노려보면 제이슨이 그 얼굴을 보고 대신 응징해주었다. 쿡 찔러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기습에 당한 딕의 모습에 조금 시원해졌다. 잘했어, 제이슨.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
"일단 브루스가 생각하는 그런건 아니예요, 아마 「산타」의 영향으로 다른 우주의 제이슨과 뒤바뀐 모양이라."
브루스가 아이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며 딕에게 물으면 그가 목을 가다듬고 설명했다. 그것도 저희 나이가 반전된 세계에서요, 이 애는 제이슨 웨인이고 위로는 두 형이 아래는 동생이 하나 있다고 해요. …그렇구나. 뭐, 우리가 아는 제이슨이라면 팀을 이렇게 따르는 것도 이상하죠. ……그래, 그렇지. 그렇게 고개를 주억이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는 브루스에 딕이 아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고개만 쏙 돌려 딕을 바라보면 딕이 아이에게 윙크를 하며 부탁했다.
"브루스가 널 안아보고 싶은 모양이야, 한번 안겨주지 않을래? 네가 보다 싶이 나나 제이는 너무 커버렸거든. 데미안이 안기는 아이도 아니고."
다 들린다, 그레이슨. 그럼 리틀 디, 네가 안겨줄거니? 딕의 물음에 데미안이 조용히 외면했고 다시 딕이 아이에게 고개를 돌려 손을 모아 부탁하자 아이가 팀을 쓱 보고 손을 놓고 브루스 앞에 가 양 팔을 벌렸다. 그래도 '제이슨'이라 탐탁찮아 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손 쉽게 다가가는 모습에 딕이 입을 다물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다른 사람이었다.
「산타클로스」 동서고금 아이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이름을 한 이 빌런은, 이야기 속에 나오는 산타처럼 붉은 옷을 입은 (제이슨의 말에 따르면) 미친 놈이었다. 본인에게는 어떤 유감도 없는 모양이지만 미친 놈들의 사고가 그렇듯 의도와는 상관없이 고담에 혼란을 야기하는 놈으로 어젯밤도 미친 짓을 하는 와중에 제이슨의 생일이 내일 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제 파티 계획을 망치는 주범들인 자경단이지만 그에게 유감은 없었던지 축하해주겠다고 선물 빔을 맞아버렸고,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주변인들의 만류에 의해 그 날 밤은 웨인저택에서 보내기로 한 것인데-…눈을 뜨니 다른 우주의 제 방에서 눈을 뜬 셈이었다.
“우리와 같네. 제이슨…, 로빈도 어젯밤 「산타」를 보았고, 오늘이 로빈의 생일이란 것도 알게 되었었어. 놈에게 무언가 당한것 같았고 그게 신경쓰여 방에 찾아갔던 거였고.”
“걔 뿐만이 아니라 너 또한 그랬다면 그게 계기겠지. 서로 다른 우주에서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게 우연의 일치라고 할지라도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고 할 없으니까. 그래, 놈에게서 따로 들은 말은 없나?”
“글쎄, 미친 놈의 헛소리는 담아 듣지 않는 주의라서. 네 동생에게 묻지 그랬어?”
말을 안해. 상황을 알아야 대처라도 할텐데, 물으면 경계부터 하지. …데미안의 경우는 평소의 행실 탓도 있긴한데, 솔직히 우리가 아무리 물어도 대답을 해주지가 않아. 우리에게 걱정을 끼치는 게 싫은건지 말 못할 다른 이유가 있는건지. 어느 쪽이건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 이렇게 되어버린게 좀 속상해.
“…걔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특별한 이야기를 한 적은 없어. 아, 그래. 행복한 생일을 보내라는 말은 했었어.”
이 사단을 내놓고 ‘행복한’ 생일 따위 즐길 수 있겠냐만은. 제이슨이 늘어놓은 상황에 팀이 제 동생이 겪은 일을 털어놓았다. 「산타」가 벌이는 기상천외한 사건들과, 가끔 나비효과로 커다란 사건을 만들고 하기에 데미안은 두 사건을 따로 보지 않았다. 다른 우주간 같은 일이 일어났으며 그걸 겪은 두 사람이 뒤바뀌었으니 일리있는 추측이긴 했다. 다만 당시 제이슨은 그저 X 밟은 심정으로 흘려듣기도 했고 기억을 되짚어 보자면 쓸데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적어도 제이슨과 아이간의 공통 분모가 더 있다는 원인을 찾는데 수월하겠으나 아이는 아무래도 제 형제에게 다 털어놓지는 않은 모양이었고 그것이 그의 맏형인 데미안의 심기를 거슬렀는지, 누구 한 사람 죽어나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럼 이렇다할 단서는 없다는 거네. 혹시 모르니 케이브에서 간단한 검사를 받았으면 좋겠어. 물론 네 말을 의심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차원이동을 겪은 만큼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정돈 나도 알아. 겨우 검사따위로 기분이 상할리도 없고.”
그런 데미안을 나무라는 듯 그의 뒤통수를 가볍게 친 팀은 데미안의 매서운 눈초리를 흘기며 제이슨에게 검사를 제안했다. 혹 기분이 나쁠까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어주는게 묘한 느낌을 주었다. 보통 그 곳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는 일은 딕이 도맡아 했었으니까. 물론 아이인 이곳에 딕에게 그런 일을 맡기진 않을테고, 제 과거를 되짚어 보아도 그런 일엔 적합하지 않았으니 윗대가 해야할 일은 맞았다. 그리고 그게 데미안보다는 팀이 더 어울릴 것이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영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 매치가 되지 않았다. 그 데미안이 팀에게 맞고 노려보는 것으로 끝내는 일도 그렇고.
“이후 거처는 어떻게 할거야? 네 동생의 방에 계속 머물 수는 없을 거 아니야.”
“당연히 저택에서 머물러야지. 네가 제이슨 토드인 이상 내 동생이다. 난 네 동생을 허름한 곳에서 재울 생각은 없어.”
“그래, 제이의 방이 불편하다면 방을 따로 만들어줄게. 응?”
당연한 것을 물었을 뿐인데. 데미안은 으레 당연한 듯 웨인저에 머무는 것을 바랐고 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케이브까지 동행해 했던 검사는 어젯밤과 같이 눈에 띄는 점은 없었으므로 어떠한 문제도 없었을터인데 그들은 제이슨이 바깥에서 머무는 것을 반대했다. 차라리 제이슨이 성장한 모습인 그가 바깥에 들어나 혼란을 야기할까 걱정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마음이 편했을 것을. 두 쌍의 눈에는 오로지 제이슨을 향한 걱정밖에 없어서 가슴에 무언가 얹힌 듯 답답했다. 팀으로 말하자면 제이슨의 양 손을 모아 쥐고 부탁하는 모양까지 취해 제이슨은 그 손을 빼는 것 외에는 할 수 없었다. 짓눌린 가슴탓에 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으니까.
애정이라는 것은 늘 이렇게 불편했다. 당연하지 않은 주제에 당연한 듯 찾아와 제이슨이 그것에 목매게 끔 만들었다. 손안의 모래처럼 금방 빠져나갈 것임에도 어떻게든 한톨이라도 놓지지 않고자 손을 꾸욱 말아쥐었던 어렸고 바보같았던 제이슨 토드. 그들의 앞에 서면 제이슨은 그때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빈 주먹을 여전히 놓지 못하는 제이슨은 팀의 요청을 온전히 거절하지 못하고 침묵을 택했다. 침묵은 곧 긍정, 밝아지려는 팀과 두 사람 사이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밀려왔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다니 별일이구나. 무슨 일 있니?”
제 기억과 다르지 않은 목소리는 전에 없을 정도로 다정한 어투로 두 남자에게 말을 건냈고, 제이슨은 몸을 굳혔다. 오-….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당연히 함께 앉아있는 제이슨에게도 눈길이 닿았고 그는 짧게 감탄사를 뱉었다. 아버지. 브루스. 각기 제 성격대로 그들의 아버지를 불렀고 그는 제이슨을 바라보다 아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사춘기라도 아이가 이렇게 쑥쑥 자라는 줄은 몰랐구나.”
아무리 그래도 근육까지 자라지는 않죠. 브루스가 건낸 농담에 팀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어젯밤에 만난 「산타」때문에 다른 우주의 그와 바뀌었어요. 저희가 안지도 얼마되지 않았구요. 그래, 제이슨이 울고 있진 않을지 걱정이구나. 그 걱정 아까 티모시가 했었어요. 그러니? 부모는 늘 아이의 걱정을 하는 법이지. 팀은 멋진 아버지가 될 거 같구나. …그런 농담 재미없어요, 브루스.
“…제이슨?”
세 사람의 교환에도 꿈쩍하지 않던 제이슨을 브루스가 불렀다. 이름까지 불린 마당에 언제까지 모른 척 할 수는 없었기에 돌아가지 않는 목을 돌리면 온화한 그의 얼굴과 마주했다. 늘 고집스러웠던 얼굴이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어서 더 목이 메었다. …멋지게 자랐구나. 얼마나 머물지는 알수 없지만 내 집이라고 생각하고 편히 지내렴.
물론 네 집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가끔 심심하다고 생각되면 내 말벗이 되어주련? 브루스의 제안에 제이슨이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시간 되면-… 시간이 되면요. 그것은 거의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다름 없었지만 그가 웃으며 답했다. 고맙구나. …어떤 것들이 듣고 싶은데요? 네가 좋아하는 것들이나, 네 친구 이야기. 최근에 들었던 재밌는 이야기도 좋겠구나.
“-…그만 올라갈게요.”
“곧 식사가 준비될텐데, 하지 않고?”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이 안들어서.”
…그래, 우리도 놀랐으니 본인인 너는 얼마나 당황했겠니. 알프레드에게 말해둘 테니 언제든 그럴 마음이 들면 말하렴. 식사를 하지 않고 올라가겠다는 말에도 브루스는 제이슨을 나무라지 않았다. 그야 엄밀히 따지자면 자기 아이도 아니겠지만, 그 행동이 꼭 제이슨이 꿈꿔왔던 이상적인 아버지라. 괜히 제 입술을 짓씹으며 윗층으로 올라갔다. 다른 방이 준비되지 않았으니 제이슨은 제가 있던 곳의 웨인저택의 ‘그 방’과 다름 없는 그 곳으로 돌아가야 했으나 적어도 불편한 공기가 맴도는 이곳보다는 나을 것이다. 제이슨은 두번다시 이 더럽게 온화한 공기에 길들여지고 싶지 않았다.
“왔어요? 와, 몇분 사이에 십년은 더 늙어보여요.”
“딕-.”
워어, 농담이예요. 아이와 있는게 그렇게 힘들었어요? 고장난 브루스의 품에 안긴 아이는 긴장이 풀렸는지 그 사이 잠이들었고, 아이를 안고있다는 이유로 제이슨의 방으로 돌려보내는 역할이 맡겨진 브루스가 그 사이 세월의 풍파를 맞고 돌아왔다. 딕의 농담에 얼굴을 굳히며 말하는 것을 보면 여전히 정정해 보였지만. 그런건 아니다, 다만-… 그 아이를 안아본 게 너무 오래되서. 그냥,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랐을 뿐이야. 그가 딕의 맞은 편에 앉으면 알프레드가 그의 몫의 차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팀은 해결방법을 찾아보겠다며 케이브로 내려갔고, 데미안은 타이투스를 산책시키러 나갔어요.”
“…그래.”
브루스의 대답에 차를 한모금 마신 딕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제이슨이랑 많이 달랐죠? 나이대는 비슷한 것 같았는데, 아이는 정말로-… 사랑받은 티가 났어요. 여전히 말랐지만 혈색은 좋았고 사람에게 뻗는 손에 망설임이 없었어요. 마치 내쳐진다는 생각은 조금도 안하는 것 처럼. 브루스, 우리가 그 애를… 제이슨을 더 상냥히 대했다면 아이와 같았을까요? 괜한 추측은 하지 마라. 하지만-…
“「만약」같은 쓸데없는 가정도 없다.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는 없어. 그리고 딕, 너는 최선을 다했다.”
‘나’는? ‘우리’가 아니라? 브루스의 단어선택에 그를 바라보면 그는 조용히 붉은 홍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브루스가 찻잔 너머로 바라보고 있는 게 정말 ‘홍차’일지는 알 수 없지만. 조금만 더 그 아이에게 신경을 썼더라면-… 그것은 브루스가 지금껏 안고있는 후회 중에 하나기도 했다. 그 시절의 브루스의 관심은 늘 제이슨과의 다툼을 낳았었다 그가 조금더 제이슨에게 관심을 기울였다고 해서 제이슨의 결말이 달라졌을까? 어쩌면, 예정되었던 결말이 조금더 빨랐을지도. 그의 의심은 고담을 지키는 발판이 되기도 했으나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눈을 뜬 제이슨은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어색한 천장을 보았다. 몸을 일으킨 제이슨의 눈에 들어온 것은 제것과 다름 없으면서도 어딘가 낡은 기색이 있는 물건들로 제이슨이 아직 제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필이면 생일에. 제이슨 토드의 인생이 으레 그렇듯 제이슨 웨인이 되어도 여전히 그는 운이 없었다.
“…하필이면 생일에 그럴게 뭐람.”
제이슨에게 오늘은 매우 특별한 날이었다. 일년에 한번은 꼭 찾아오는 이 날이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겠냐만은 그날은 제이슨이 가지못한 유원지를 가족과 함께 가기로 한 날이었다. 제이슨의 말이라면 딴지를 걸기 바쁜 데미안도, 일에 치이느라 늘 바쁜 팀도 오늘만큼은 시간을 내주었고 제이슨의 착한 동생인 디키는 제이슨과 함께 갈 날을 손에 꼽았다. 그와함께 달력에 엑스자를 그려가며 얼마나 설레어 했던가. 그런데 그 당일, 제이슨은 차원이동이라는 드문 경험을 하며 그 약속을 날리게 생긴 것이다.
처음엔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들이 무서웠고 긴장되었으나, 제 가족들과 같이 첫인상은 그래도 다정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니 억울한 마음이 퐁퐁 솟았다. 이게 다 어젯밤에 만난 「산타」 때문이었다, 행복한 생일은 무슨. 덕분에 최악의 생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귀여운 동생에게는 약속조차 지키지 않는 매정한 형이 될 것이고. 아무리 생각해도 분이 풀리지 않아 애꿎은 침대를 때렸다. 이것이 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쓰다듬었다. 미안해 침대야, 하지만 산타놈이 너무 열받게 해서 어쩔수 없었어.
“아, 그래.”
자연스레 자신의 잘못을 산타에게로 돌린 제이슨이 자리에서 폴짝 일어났다. 팀 형의 말에 따르면 빌런들이 흘리는 어떠한 단어도 단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무수한 사건을 일으킨 산타는 제이슨의 생일에 주목했고 생일을 축하하고자 했다. 그럼, 그건 어떤 단서가 되지 않을까? 제이슨은 이 사실을 배트맨 패밀리에게 알려주고자 방을 나섰다. 혹시나 하는 기대에 걸음 소리를 죽이지 못했지만 걸음걸이에 품위가 없다고 면박을 줄 ‘데미안’은 이곳에 없었다. 제이슨의 말에 귀를 기울여줄 ‘팀’은 없으나 대신 제게 신경을 기울이는 ‘리처드’는 있었다. 리처드! 제이슨이 그가 있을 거실로 달려 내려가며 그의 이름을 부르면 예상대로 거실에 앉아있던 그가 부름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제이슨?”
제이슨을 본 딕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계단 쪽으로 다가갔고 계단을 달려 내려온 제이슨을 어렵지 않게 받아내었다. 무슨 일이야, 이렇게 급히 달려 오기까지 하고? 달려오느라 가쁜 숨을 좀 고른 제이슨이 리처드를 향해 고개를 바짝 들어올리며 말했다. 생일이야! 생일? 그래, 오늘이 제이의 생일이니 네 생일이기도한…
“아니, 그게 아니라 놈이 생일인 걸 알고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걸 들었는지 내일이 생일이라며? 축하해주고 싶다고 하며 빔 같은걸 쏘았어! …케이브에선 검사해봤고? 당연하지! 다른 점은 없었지만-… 오늘은 내 생일이고 이런일이 일어났지. 어떤 단서가 되지 않을까? …일리가 있군. 브루스! 제이슨이 꺼낸 말에 뒤편에 앉아있던 브루스가 입을 떼었다. 그가 끼어들줄은 몰랐는지 놀란 딕이 그를 돌아보았다. 제이슨 또한 같은 일을 당했다고 들었는데, 다르니? 아뇨, 맞아요. 검사도 진행했었고요. 별다른 점은 찾지 못했지만요. 다른 우주에서 같은 날 같은 경험을 한다는게 영 마음에 걸리는 구나. 그렇게 접점이 높아졌을때 그의 빔이 트리거 역할을 한거겠지. 너희가 검사를 해도 별다른 특이점을 찾지 못한건-… 이미 그 힘이 소진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구나.
“예리한 추측이구나, 제이슨.”
“팀… 팀 형이 빌런들의 단순한 말들도 힌트가 될 수 있을거라고 해서.”
브루스가 어린 제이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했고, 아이가 드물게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아주 좋은 접근이었어. ‘생일’이 핵심 키였다니, 우리라면 생각하지 못했을거야. 제가 팀에게 연락할게요. 리처드가 그 자리를 떠나며 휴대폰을 들었고 둘만 남은 거실에 제이슨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그럼, 난 언제 돌아갈 수 있나요?”
“글쎄-…단서를 찾았다고해서 완전한 해결책이 생기는 건 아니니 뭐라 확답을 해줄 수 없구나. 다만, 네 말대로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이런 일을 꾸민거라면-…늦어도 내일은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구나.”
그럼 안되는데. 무슨 중요한 약속이 있었니? …가족들이랑 놀러가기로 했어요, 데미안이랑 팀이랑 디키랑 전부. 일부러 다들 시간을 내었는데 나 때문에 다 무산이 된거잖아요. 오, 하지만 그건 「산타」의 짓이지 네 잘못이 아니지 않니. 내가 당했는 걸요. 제이슨, 누구도 피해자에게 잘잘못을 따질순 없어. …맞아요, 난 피해자였지 참. 하여간 그 새끼 때문에…! 성질머리대로 욕하려던 제이슨이 브루스를 보고 멈칫했다. 오늘은 네가 당한 피해자이고, 생일이니까 눈감아주마. 대신 모두에게는 비밀이다? 그가 능청스레 말은 얹으면 제이슨이 즐겁게 웃었다. 멋진 생일선물 고마워요!
“참, 하고 싶은게 있는데 도와주실 수 있나요?”
“내가 도울수 있는 것이라면.”
똑똑. 통통 튀는 노크소리에 제이슨이 대답하자 문이 살짝 열리며 문 틈 사이로 조그마한 머리통이 볼록 솟았다. 부드러울 것 같은 검은 머리카락에 이어 하얀 피부, 그리고 개인 하늘을 닮은 푸른색 눈동자가 차례로 들어오며 그 주인을 알렸다. …디키? 침대에 걸터 앉은 제이슨과 눈이 마주한 딕은 활짝 웃으며 방안으로 들어왔다. 제이 형! 배고프지 않아? 내가 샌드위치 가져왔는데! 내가 방금 식사를 거절하고 들어온 것 같은데. 제이슨은 떨떠름하게 딕이 든 바구니를 내려다보았다. 딕 역시 그 장면을 보았을 텐데 모르는 척 음식 바구니를 가져온 것이 대단했다. …고마워. 어린 아이가 저를 챙겨주고자 바리바리 싸들고 온 것을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였다.
“그런데 딱히 앉아서 먹을 데가 없네. 침대 위에서라도 먹을까?”
“지붕 위는 어때?”
받아든 것까진 좋았는데 어른 한명과 아이가 오손도손 나눠먹을 자리가 여의치 않았고, 차선을 고르는 와중에 딕이 창을 가리키며 제안했다. 딕이 쉽게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보아 방의 주인은 딕과 이따금 옥상에서 간식거리를 나눠 먹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건 늦은 시간의 일일테고 이른 시각에 하진 않았을텐데. 응? 무엇이 잘못된지도 모르고 제 얼굴을 바라보는 딕에 제이슨은 달리 생각해보았다.
아무리 훈련받은 로빈이라 할지라도 오랫동안 자경단생활을 한 아이의 형들보다는 덜할 것이고 당연히 두 아이가 지붕 위에서 종종 머물렀던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딕이 지붕 위를 제안할 것도 상정해 두었을 것이고. 만약 그곳으로 가는게 저어 된다면 딕에게 당부를 했었을 것이나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는 건-… 제이슨이 그곳에 가더라도 크게 문제 없다는 의미겠지. 그래 가자.
그 옛날 자신의 형을 자처하던 그가 했던 것처럼 창을 열고 딕을 이끌었다. 이끄는 사람과 이끌림을 받는 사람도 달랐지만, 그것은 제이슨이 가진 몇 없는 좋은 기억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대저택의 지붕 위에서 무언가를 먹는다는게 흔한 경험은 아니었고, 일종의 일탈과도 같아서 그게 썩 즐거웠었지. 딕을 붙들어 지붕위로 올린 뒤 익숙하게 올라가면 아이가 깔끔하게 만들어진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단면에 드러난 식재료들이 반갑게 느껴졌다. 저택 밖의 세이프 하우스에 둥지를 틀었기도 하고 이따금 식사를 함께하곤 하지만 이런 간편식은 꽤나 오랜만이었다. 조심스럽게 베어물면 그리운 맛이 들었다.
“생일 축하해, 제이 형.”
제이슨이 조용히 맛을 곱씹고 있으면 딕이 그 침묵을 틈타 살며시 말을 얹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라 삼키면 사레가 들려 기침을 토해냈다. 괜찮아? 여기, 쥬스. ‘딕’은 동생이어도 여전히 챙김이 좋은지 바구니 안에 준비해 온 음료를 따라 제이슨에게 넘겼고 냉큼 받아 삼킨 제이슨은 조금 매인 목소리를 내었다. 갑자기?
“갑자기는 아니지, 우리 형의 생일은 제이 형의 생일이기도 하잖아. 하필 이런 일이 벌어져서 그렇지.”
이런 일이 없었다면 가족들이랑 축하하고 있었을텐데. 시무룩한 딕의 얼굴을 보며 제이슨이 말없이 아이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이 집구석 처럼 아침부터 만나 축하하는 그런 사이는 아니었지만, 축하는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누가 뭐래도 배트맨의 훌륭한 아들이었던 ‘딕 그레이슨’은 챙김이 좋은 놈이라 제 생일을 축하해주겠다고 찾아올 것이고, ‘팀’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나쁘지 않은 관계를 구축해왔고 문자로든 축하를 받겠지. ‘데미안’은-…그는 정말로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역시 축하는 해줄 거 같긴했다.
“고맙다.”
제이슨은 아이에게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기보다 그저 인사를 전하면 그것만으로 기쁜듯 어린 딕이 배시시 웃었다. 저를 걱정하는 이상적인 아버지에 싸고도는 두 형들, 잘 따르는 동생. 이곳의 제이슨 토드는 참으로 복받은 이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레드 후드는, 레드후드인 제이슨은 가지지 못한 걸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제이슨을 시기하기보다 그의 행복이 보다 오래가길 바랐다. 무엇보다 이곳의 제이슨은 아직 어렸으며 어린 아이의 생일에 어른이 선물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디키, 잠깐 도와주지 않을래?”
"마침 잘 왔군, 희소식이다."
딕과 함께 거실로 내려온 제이슨은 기척을 느끼고 돌아본 데미안과 마주했다. 그를 비롯해 팀, 브루스는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과 별개로 긍정적인 단어를 입에 담았다. 희소식? 제이슨이 되묻자 데미안이 쉬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 아버지께서 놈이 말한 단어에서 연관성을 찾아냈어. 머릿속이 엉망진창인 놈이니 제대로 된 동기랄 것도 없었다, 놈은 단순히 너와 제이슨의 생일을 축하하고 싶었던 모양이야. 사용한 도구는 ‘복조리’로 이전에도 행복한 생일이 되라며 타인에게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어. 본인의 말로는 하룻동안 행운아가 되는 효과라고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그 효과대로 이루어지진 않았지. 데미안의 설명에 제이슨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놈은 순전히 선의로, 그러나 실패한 전적이 있는 도구를 사용했다. 이건 미필적 고의라고 봐도 되는거지? 어떻게 하면 놈을 잘 족쳤다고 소문이 날까. 제이슨은 끌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않기로했다. 이 문제 만큼은 제가 사는 곳의 배트맨 패밀리도 이곳의 웨인 패밀리도 막지 않으리라.
“그걸 지금 희소식이라고 이야기 한건 아니겠지?”
“설마. ‘복조리’의 효과는 짧아. 맞은 순간부터 24시간이면 효과가 풀려, 잠든 사이에 변화가 왔으니 그 시간을 오차로 두더라고 내일이면 돌아갈거다.”
너는 이곳을 불편해했으니 내일이라도 떠날 수 있다는 건 네게 반가운 소식일텐데? 데미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불편한 내색을 숨기지 않았으니 누구라도 알아챘으리라. 그, 그럼. 오늘 안엔 못 돌아와? 제이슨과 함께 내려온 딕이 두 형과 양부를 보며 물었고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 안돼는데-… 그럼 선물 못주는데.”
“선물?”
딕이 흘린 소리에 데미안이 되물었다. 응, 생일선물! 제이 형이 제이형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거든, 생일선물은 역시 생일에 열어봐야하잖아. 둘만의 이야기를 술술 부는 딕에 제이슨이 변명을 하듯 입을 열었다. 생일도 알고 있는데 어른이 되서 아무것도 챙겨주지 않는 건 좀 그렇잖아. 제이슨 본인이야 이곳의 제이슨과 별개의 인물로써 구분하고 있었으나 결국 본인이 본인의 생일을 챙겨주는 꼴이지 않은가. 제이슨은 딕의 입을 막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며 데미안의 눈치를 살폈다. 적어도 제이슨이 아는 ‘데미안’은 제이슨을 놀릴 수 있는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을 인물이었다.
“…그렇군. 알고 있으면서도 축하해주지 않는다는건 말이 안되지.”
그러나 제이슨이 주워섬긴 변명이 데미안에게 어떤 감흥을 주었는지 그 말을 조금 곱씹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호하는 제과점이 있나? 데미안의 질문에 놀란 제이슨이 엉거주춤 대답을 하면 그대로 자리를 떠났고 그자리에 있던 팀이 묘한 미소를 띄며 물었다. 갖고싶은 건 없어? 기왕이면 들고 돌아갈 수 있는 종류면 좋을거 같은데. 데미안에 이어 팀까지, 당최 이러한 것들을 묻는 이유를 알 수 없어 물러서면 제이슨의 당황을 읽고 옅게 웃었다.
“너무 경계할 거 없어. 네 말대로 네 생일임을 뻔히 아는데도 챙겨주지 않는다면 조금 그렇잖아? 그냥 챙겨주고 싶은거야 나도, 데미안도.”
“앗, 그럼 나도!”
제이슨의 옆에 찰싹 붙어있던 딕이 무엇인가 생각난듯 발을 구르며 윗층으로 올라갔다. 당장에 생각나는 건 없어보이니 내가 알아서 적당히 사올게. 팀이 겉옷을 들고 일어섰고 거실엔 제이슨과 브루스만이 남아 있었다. 제이슨은 브루스가 불편했고, 브루스는 말이 없는 편이었다. 모두가 돌아오기 전에 자리를 뜰까 고민하는 중에 브루스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사실 제이슨이 너만큼 성장했을 즈음 주고 싶은 선물이 있었단다.”
“그 애가 나만큼 자랄려면 한참은 남았을 텐데.”
그래, 그래서 매년 그 애에게 줄 선물을 손보고 있지. 아마 그건 그곳의 나 역시 같을 테니 양보하마. 양보받는지도 모를 사람에게 양보를 해서 뭘해요. 하지만 그건 매우 특별하거든, 세계에서 단 하나 뿐일 물건일테니까. 내가 지금 미리 줘버린다면 유일이 아니게 되잖니? 그건 제이슨에게도 못할 일이라 생각한단다. 그래서, 지금 내게 선물을 못주겠다는 거죠? 딱히 바란적도 없지만. 그럴리가,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을 준비했다. 받아주겠니?
째깍, 어째선지 선명히 들리는 시곗바늘 소리에 맞춰 눈을 깜박이면 제 가족들이 제이슨을 마주보고 있었다. 가족, 가족이라. 그 집에 있는 짧은 기간동안 그 사이 익숙해졌는지 제이슨은 저도 모르게 꼽은 단어를 곱씹었다. 생일 축하해, 제이슨. 그리고 제이슨의 그런 감상을 기다려주지 않겠다는 듯이 적막을 깬 목소리들이 제이슨의 생일을 축하했다. 고개를 들어 마주하면 유일하게 소리를 내지 않았던 브루스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생일축하한단다, 제이슨. 그 면면을 바라본 제이슨이 작게, 겨우 닿을 목소리로 인사를 전하면 그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은 가족들이 마주 웃었다.
“자자, 서두르지 않으면 늦겠어.”
하루가 다 되어가는 시각 아직 준비한게 있는지 딕이 제이슨의 등을 밀었고, 팀과 데미안-탐탁치 않아했지만 손을 잡고 놓지는 않았다-이 이끌었고 그 옆으로 브루스와 알프레드가 따랐다. 층계를 올라 제이슨의 방을 거쳐 아마 서재로 썼을 방 앞에 도달하고서야 걸음을 멈춘 그들은 문 앞으로 제이슨을 세웠다. 말하지 않아도 열어보라는 뉘앙스가 가득했기에 문을 열면 기억과는 다른 풍경이 방안에 들어차 있었다. 제이슨이 좋아하는 장르의 책들과 관심있는 분야로 채워진 책장에 그의 사이즈를 맞춘 침대. 작업하기 좋게 만들어진 작업대와 컴퓨터, 그리고 방 구석을 채우고 있는 크고작은 선물박스들. 대체 이 방이 뭐길래 제게 보여주나 싶어 그들에게 시선을 돌리면 의외로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널 위해 준비한 새 방이야, 네가 쓰던 방 싫어했다며?”
“…내 방?”
“건너편 제이슨에게 얼마나 혼났는지 몰라, 본인이 싫어하는 방을 왜 방으로 두고 있냐고 말야.”
듣고 보니까 맞는 말이더라고, 그래서 팀의 도움을 받아 꾸며봤어. 소품들은 팀이, 인테리어랑 컬러감은 데미안이 봐줬어. 옮기는건 나랑 브루스가 했고. 딕의 설명에 제이슨은 다시 제 방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딕의 감각으로는 할 수 없는 모습에, 팀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들이 이 안에 차있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왜? “ 솟아오르는 의문을 숨길 수 없었던 제이슨이 그것을 입에 담으면, 당연한듯 대답이 돌아왔다. 네 방이잖아. 그냥 우리가 채워주고 싶었어, 네 생일 선물이기도 하고.
“아, 물론 이걸로 모든 선물을 대체한건 아니야! 우리가 따로 준비한건 작업대 위에 올려두었으니까, 나중에 확인해. 그리고 누가 최고인지 골라줘.”
누가 최고인지 내기 했거든. 참고로 꼬마 제이슨도 참가했으니까 찾아보는 것도 좋을거야. 허? 선물이 따로 있다고? 그럼 저 구석의 선물박스들은 뭐야? 그건-… 네가 죽었었을 때, 매년 챙겼었던 나와 브루스의 선물. 뭐 웃고 싶을때나 꿀꿀할때 한번 열어봐. 사실 저건 처분할까 했는데 꼬마 제이가 반드시 전해주라고 해서.
“뭐-… 고맙다?”
뭘, 가족인데 당연하지. 제이슨이 어색하게 인사를 하면 딕이 대답했다. 브루스는 직접 전해주고 싶다고 해서, 우린 잠시 빠져줄게. 생일 축하해 제이, 생일의 마지막까지 행복하게 보내길 바라. 그리 말하며 딕은 브루스를 제외한 팀과 데미안을 데리고 밖을 나갔다. 부러 발소리 까지 내어 떠난 것을 알려주고 떠난 방 안에는 또 어색하게 브루스와 제이슨이 남아 있었다. 브루스는 곧 결심을 한듯 자켓 안주머니에서 선물상자 하나를 꺼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포장의 것을 제이슨에게 내밀며 말했다.
“기억하니? 네가 생일 선물로 시계를 주었던 때.”
망가진 시계를 네가 고쳐주었지. 난 솔직히 그 시계가 다시 돌아올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단다. 하지만 넌 예상을 부수고 멋진 시계를 선물해 주었지. 그 때부터 생각했단다. 네가 손목시계가 잘 어울리는 나이가 되었을 때, 시계를 선물 해주자고. 제이슨이 말없이 받아 브루스를 바라보면, 브루스가 재촉했다. 열어보겠니? 가만히 열면 세련된 디자인의 시계가 담겨 있었다. 시계 유리 너머에는 웨인사의 로그가 세겨져 있었고, 시계 뒤편에도 무엇인가 새겨져 있었다. 웨인은 앞으로도 시계를 만들 예정은 없단다. 그건 오직 널 위한 하나 뿐인 시계야. 네가 그걸 마음에 들어한다면 좋겠구나.
The Dynamic Duo, Bruce wayne & Jason Todd
눈을 깜빡이면 그리운 가족들이 저를 반기고 있었다. 어서오렴 제이슨. 브루스의 한마디에 제이슨이 한껏 끌어안아 반가움을 표현했다. 브루스는 여전히 건너편의 배트맨 아저씨 마냥 제이슨이 안겨드는 것을 어색해 했으나 그와 같이 뿌리치지도 않았다. 안겨든 제이슨 위로 데미안과 팀, 그리고 도움닫기를 날개삼아 뛰어든 딕까지. 모두가 한데 모여 포옹했다. 생일을 축하한단다, 제이슨.
가족들과 단촐한 파티와 선물 증정식을 끝내고 방으로 돌아오면 딕이 예고했던 대로 자그마한 선물과 편지가 놓여있었다. 하루를 꼬박 사용했다는 선물은 그의 가족들이 새겨진 나무 조각이었다. 가족들이 모두 그려진 초상화도 있으나 이 조각은 특별했다. 왜냐하면 이건… 웨인 패밀리가 아닌 배트맨 패밀리의 조각이었으니까. 카울을 눌러 쓴 굳은 표정까지 제법 잘 만들어져있었다. 제이슨은 작게 감탄을 하며 접혀 있는 편지를 펼쳤다. 조각에 신경을 쓴만큼 편지 내용은 단촐했으나, 제이슨에게 웃음을 선사하기에는 충분했다.
Happy Birthday, Jason Todd-Wayne.
Ps.너네 가족 쩔더라. 행복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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